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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오펜하이머> 개봉: 원자폭탄의 아버지 오펜하이머의 파란만장한 인생
<KISTI의 과학향기> 제3883호 2023년 08월 14일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39년, ‘핵분열 연쇄반응’이 발견됐다. 원자핵이 분열하는 과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사슬처럼 일어나 강력한 에너지를 내는 반응이다. 당시 물리학자들은 이를 활용하면 지금까지 없던 위력의 (新)무기, 원자폭탄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또 ‘누가 먼저 이 무기를 손에 넣느냐에 따라 인류 역사가 바뀔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그림 1. 1941년 12월 7일 벌어진 일본의 진주만 공습은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본격적으로 참전하는 계기가 됐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날을 고의적으로 기습당한 ‘치욕의 날’로 기억하며 전쟁을 선포했다. 출처: Wikipedia
미국과 독일 양측은 상대방이 먼저 원자폭탄을 개발할 것을 우려했다. 특히 독일 나치의 침략과 유대인 말살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과학자들은 독일의 원자폭탄 개발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에 따라 미국 과학자들 사이에서 미국이 먼저 핵무기를 개발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헝가리 출신 물리학자 실라르드 레오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원자폭탄을 개발해달라는 내용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서명이 담긴 편지를 보냈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이에 승인하면서, 사상 최대 규모의 국가 과학 프로젝트였던 ‘맨해튼 계획(Manhattan Project)’이 막을 올렸다.
맨해튼 계획은 처음에는 연구비 6,000달러로 소박하게 시작했지만, 미국이 본격적으로 2차대전에 참전하면서 연구비 20억 달러, 고용 인원 13만 명의 초거대 프로젝트로 성장했다. 미국 뉴멕시코주 로스앨러모스와 테네시주 오크리지 등에 비밀 연구소가 설립되고, 캐나다와 영국을 포함해 30곳 이상의 대학과 시설에서 연구가 진행됐다. 투입된 예산과 시설만큼, 연구에 참여한 과학자들도 엄청났다. 닐스 보어, 엔리코 페르미, 존 폰 노이만, 리처드 파인만 등 노벨상을 받았거나 훗날 타게 되는 당대 최고의 과학자들이 맨해튼 계획에 대거 참여했다.
그림 2. 원자폭탄의 아버지,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출처: Wikimedia Commons
정리해보면, 맨해튼 계획은 세계의 운명을 건 전쟁을 끝내기 위해 막대한 규모의 예산과 시설을 관리하고, 수많은 천재 과학자를 통솔하며, 이제 막 발견된 과학 원리를 응용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무기를 불과 3~4년 만에 만들어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가진 프로젝트였다. 이 프로젝트의 리더가 바로,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였다. 오펜하이머가 어떻게 맨해튼 계획의 지도자가 되었는지를 포함해 그의 일생과 살아온 여정을 살펴보자.
예민한 괴짜 청년, 강인한 지도자로 성장하다
오펜하이머는 1904년 4월 22일, 미국 뉴욕에서 양복 사업을 하는 부유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타고난 머리와 부모님의 넘치는 교육열 덕분에, 그는 1922년 하버드 대학교에 들어갔다. 졸업 후에는 당시 물리학의 중심지였던 영국 케임브리지 캐번디시연구소를 거쳐 독일 괴팅겐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오펜하이머는 명석했지만, 불안정한 성정을 가진 탓에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괴팍한 기행을 많이 저질렀다. 강의가 마음에 안 든다고 교수를 교단에서 끌어 내리는 무례함은 기본이요, 절친한 친구가 곧 결혼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자, 자신은 결혼하지 못한 채 혼자 남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에 트렁크 끈으로 친구의 목을 졸라 죽이려 들기도 했다. 하버드대에서 케임브리지대로 자리를 옮긴 뒤에는 자신을 무시하는 지도 교수에게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교수를 죽이겠다며 책상에 독사과를 두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과학자로서는 어땠을까? 오펜하이머는 항성이 붕괴해 블랙홀을 만든다는 사실을 처음 발표하고, 양자역학을 연구해 나름의 업적을 쌓았다. 하지만 유능한 과학자였던 것과는 별개로, 나이나 경력 등을 봤을 때 맨해튼 계획에 참여한 과학자들을 이끌 만큼 대표성이 있는 학자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노벨상도 받지 못했으며, 규모가 큰 연구소를 이끌거나 복잡한 행정 업무를 해 본 적도 없었다. 게다가 공산주의를 비롯한 좌파 사상에 심취하고, 주변에 좌익 인사들이 많았기에 미군 상부들은 그의 채용을 반기지 않았다.
그림 3. 레슬리 그로브스 대령과 오펜하이머(오른쪽). 출처: Wikipedia
이런 사람이 어떻게 맨해튼 계획의 연구 책임자가 됐을까? 그를 연구소장으로 발탁한 사람은 맨해튼 계획의 책임자 미국 육군 레슬리 그로브스 대령이었다. 맨해튼 계획은 물리학뿐 아니라 화학, 야금, 군수 등 다양한 분야가 힘을 합쳐 진행되어야 하기에 그로브스는 폭넓은 지식을 바탕으로 복잡한 사안의 핵심을 정확히 파악하고 브리핑하는 오펜하이머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또 내성적인 그의 내면에 숨어있는, ‘일을 이뤄내고야 말겠다는 의지’와 ‘외부와 적극적으로 협력하겠다는 의사’가 강한 점도 눈여겨봤다.
오펜하이머는 완벽한 리더가 되기 위해 기존에 있었던 자신의 성격과 사고방식을 완전히 바꿔야 했다. 이를 위해 1942년 그는 장교용 군복을 입고, 좌파 사상과의 연을 끊었다. 6천 여명의 과학자들 사이에서 핵무기에 관한 윤리적인 논쟁이 벌어졌을 때도, 오펜하이머는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이라며 과학자들을 설득하고 이끌었다. 불안하고 내성적인 청년은 6천여 명의 과학자와 공학자들을 돌보는 행정가로 변신했다. 당시 오펜하이머의 나이는 39세였다.
원자폭탄의 참상을 알아버린 ‘원자폭탄의 아버지’
그림 4. 최초의 원자폭탄 실험, 트리니티 실험의 현장. 출처: Wikipedia
오펜하이머의 지도 덕분에 맨해튼 계획의 과학자들은 2~3년 만에 미국 뉴멕시코주의 사막 한복판에서 원자폭탄 실험(암호명 트리니티, Trinity)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1945년 7월 16일, 오펜하이머는 트리니티 실험 현장에서 원자폭탄의 엄청난 위력을 보고,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기대감과 동시에 앞으로 다가올 참극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다. 이에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 기타(भगवद्गीता, Bhagavad Gita)’의 한 구절을 인용해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Now I am become Death, the destroyer of worlds).”라며 한탄했다.
약 한 달 뒤인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미군은 맨해튼 계획 과학자들이 완성한 원자폭탄 ‘리틀보이(Little Boy)’를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했다. 사흘 뒤인 8월 9일에는 또 다른 원자폭탄 ‘팻맨’(Fat Man)을 일본 나가사키에 떨어뜨렸다. 두 원자폭탄으로 일순간에 11만~21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8월 15일 일본군은 항복을 선언했다. 지옥 같았던 제2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린 것이었다.
그림 5. 일본 히로시마에 떨어진 리틀보이(왼쪽)와 나가사키에 폭발한 팻맨(오른쪽)은 수많은 민간인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출처: Wikipedia
종전 후 철저히 비밀리에 있었던 맨해튼 계획이 대중에 공개됐다. 오펜하이머는 과학을 통해 승전에 이바지한 영웅 중 하나로 칭송받고, 1946년에는 공로 훈장을 수상했다. 정작 당사자는 수많은 사람을 죽인 최악의 무기를 만들었다는 사실에 충격받고 고뇌했다. 오죽하면 1945년 10월,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에게 “제 손에 피가 묻어있는 것 같습니다(I feel I have blood on my hands).”라고 말하기도 했다. 핵무기의 아버지가 핵무기 반대론자로 돌아선 것이다.
소련 스파이 누명으로 몰락한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하지만 그의 심정과 달리, 미국은 당시 소련을 상대로 다시 핵폭탄을 투여하는 시나리오를 계획하고 있었다. 오펜하이머는 수소폭탄 개발을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그는 원자력위원회 자문위원회 의장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수소폭탄 개발을 막으려 노력했다.
그런데 1949년 소련이 원자폭탄과 수소폭탄 개발에 성공하면서 오펜하이머는 궁지에 몰렸다. 당시 미국은 소련과의 냉전이 본격화되며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려는 매카시즘이 불고 있었다. 오펜하이머는 행정부와 정계의 불신을 사, 공산주의자에 소련 스파이라고 의심받기 시작했다. 결국 1954년, 오펜하이머는 미국 원자력위원회에서 물러나고 보안 정보에 접근하는 권한도 빼앗겼다.
그림 6. 말년의 오펜하이머. 그는 애연가였으며 죽을 때까지 담배를 손에 놓지 않았다. 출처: Wikimedia Commons
화려한 활약과 다르게 오펜하이머의 말년은 초라했다. 그는 학교로 돌아가 프린스턴대 고등연구소 소장으로 지내며 강의와 저술을 계속하다, 1967년 후두암에 걸려 62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오펜하이머의 간첩 혐의는 2022년이 되어서야 완전히 벗겨졌다. 미국 에너지부는 2022년 12월 15일, 성명을 통해 “오펜하이머의 보안 승인에 대한 1954년 원자력위원회의 결정에는 결함이 있었다”라며 그의 충성심과 애국심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핵’이라는 새로운 불을 선사한 오펜하이머의 삶은 2005년 1,000페이지가 넘는 평전 <아메리카 프로메테우스>로 기록된다. 영화 <인셉션>과 <인터스텔라>를 제작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이 평전을 바탕으로 그의 일생을 다룬 영화 <오펜하이머>를 제작했다. 놀란 감독은 “좋든 싫든 오펜하이머는 지금까지 살았던 사람들 중 가장 중요한 사람이며,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며 오펜하이머의 영향력이 엄청났음을 강조했다.
그림 7. 크리스토퍼 놀란이 메가폰을 든 영화 <오펜하이머> 포스터. 출처: 유니버셜 픽처스
영화 <오펜하이머>는 국내에서 8월 15일, 우리나라가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된 광복절에 맞춰 개봉된다. 영화에서 나오는 웅장함에 감탄하는 동시에 핵무기가 인류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고민해보는 시간을 갖는 건 어떨까? 오펜하이머를 한 인간으로서 이해할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글: 한세희 과학칼럼니스트/일러스트: 이명헌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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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봐야겠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2023-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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