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학향기 Story
- 스토리
스토리
장내 미생물로 혈액형을 바꿀 수 있다?
<KISTI의 과학향기> 제3379호 2019년 07월 01일최근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 화학과 스티븐 위더스 교수 연수팀이 효소를 이용하여 A형 혈액의 항원 단백질을 제거해 A형 혈액을 모두에게 수혈할 수 있는 O형 혈액으로 바꾸는 기술을 개발했다. 이번 연구는 저출산과 고령화로 인한 수혈용 혈액 부족 문제에 도움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누구에게나 수혈할 수 있는 O형 혈액
수혈 기준인 ABO식 혈액형은 적혈구 표면에 붙어있는 당사슬인 ‘항원’이라는 물질 구조의 차이에 따라 A형, B형, O형, AB형으로 구분한다. A형 적혈구에는 ‘N-아세틸 갈락토사민’이, B형 적혈구에는 ‘갈락토스’가 있다. AB형은 둘을 모두 갖는다.
이러한 차이 때문에 서로 다른 혈액형의 혈액이 섞이면 면역체계가 이를 알아차리고 혈액에 공격을 가하게 된다. 바로 '항원항체결합반응' 때문이다. 항원항체결합반응은 항원과 항체 사이에 발생하는 특이 반응 및 현상을 뜻한다. 심한 경우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한편 O형 혈액은 누구에게 수혈해도 거부반응을 일으키지 않는다. O형 적혈구에는 항원이 없기 때문이다. 이 같은 장점 때문에 과학자들은 언제나 수혈이 가능한 O형 혈액을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서 A형 혈액에서 A형 항원을 제거하는 방법을 연구해왔다. 그러나 이같은 노력에 대해 국제학술지 ‘사이언스’는 “적혈구에서 항원을 제거하는 효소가 효과적으로 작동하지 않아 효율이 떨어졌다”고 평가했다.
4가지 혈액 중 A형 혈액을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한 것은 A형 혈액이 수혈용 혈액의 약 3분의 1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만약 누구에게나 수혈 가능한 만능혈액(universal blood)이 개발된다면 사고 희생자의 혈액형을 따질 겨를이 없는 응급실과 같은 곳에서 유용하게 쓰일 터였다.
사진 1. 과학자들은 누구에게나 수혈이 가능한 O형 혈액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을까 연구해 왔다. (출처: shutterstock)
장내 미생물 이용해 A형 항원 제거
이에 위더스 연구진은 A형 혈액을 O형 혈액으로 만들기 위해 인간의 장내 미생물에 주목했다. 일부 장내 미생물이 소화기관 벽에 붙어있는 ‘뮤신’을 분해해 섭취하는 현상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뮤신은 인체에서 분비되는 점액에 끈기를 부여하는 당-단백질 복합체로, 적혈구의 형을 규정하는 항원과 비슷하다.
연구팀은 인간의 대변샘플에서 장내 미생물을 수집하여 DNA를 분리했다. 대변 속의 DNA에는 뮤신을 소화하는 장내 미생물의 효소를 만드는 유전자가 포함되어 있다. 연구팀은 이렇게 수집한 DNA를 잘게 썰어서 대장균(E. Coli)에 삽입한 뒤, 어떤 대장균이 A형 항원을 제거하는 효소를 생성하는지 관찰했다.
이를 통해 연구팀은 A형 항원을 제거하는 두 종류의 효소를 찾아냈다. 연구진은 두 가지의 효소를 동시에 테스트했고 그 결과 소량으로도 항원을 제거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러한 효소를 만든 주인공은 ‘플라보니프락토르 플라우티이(Flavonifractor plautii)’라는 장내 미생물이다. A형 항원의 당사슬을 끊어 O형으로 만드는 데에는 ’알파-N-아세틸 갈락토사미니데이스‘ 효소가 쓰였다. 국제학술지 ‘네이처 미생물학’ 10일자에 발표된 논문에 따르면 소량의 혈액을 O형으로 바꾸는 실험까지 현재 완료된 상태다.
사진 2. 연구팀은 장내 미생물이 만드는 효소를 이용해 A형 항원을 제거했다. (출처: shutterstock)
혈액 부족 사태 완화하는 데 이바지할 것
전 세계적으로 헌혈이 가능한 인구는 갈수록 줄어든다. 한국 역시 현재 3천900만 명 정도에서 헌혈 가능 인구가 계속해서 줄어들어 2050년이 되면 약 2천900만 명 정도로 감소할 것으로 전망된다. 대한적십자사 혈액관리본부에 따르면 만 16~19세 헌혈자는 2013년에 약 105만 명에서 2017년에 약 91만 명으로 지난 4년 동안 14만여 명이 줄었다. 누구에게나 수혈할 수 있어 흔히 쓰이는 O형의 경우는 그중 가장 부족한 혈액이다.
위더스 연구팀은 2007년 이미 A형에서 O형으로 혈액형을 바꾸는 효소를 찾아냈으나 이를 다량으로 투입해야 하는 등 경제적이지 못해서 지난 4년간 추가적인 연구를 거쳤다. 위더스 교수는 “이번 연구는 혈액의 공급량을 늘려 혈액 부족 사태를 완화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면서도 “A형 항원이 모두 제거되는지 확인하려면 후속 연구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글: 김민아 과학칼럼니스트/일러스트: 유진성 작가
추천 콘텐츠
인기 스토리
-
- [과학향기 Story] 점점 더워지는 여름, 건물 온도를 낮출 방법은?
- 올해 여름은 기상 관측 역사상 가장 뜨거운 해였다. 올해 여름철 평균기온은 이전 최고 기록인 2018년보다 0.3℃ 높은 25.6℃를 기록했다. 심지어 폭염과 열대야도 그 어느 해보다 잦았다. 사람들은 지속된 찜통더위를 견디기 위해 건물에선 쉴 새 없이 에어컨을 가동했다. 그 결과 일별 최고 전력 수요도 97.16GW(8월 20일)로 관측 역사상 최고...
-
- [과학향기 Story] 강의실 천장이 높으면 시험을 망친다?
- ‘시험을 망쳤어 오 집에 가기 싫었어 열 받아서 오락실에 들어갔어’ 다들 한 번쯤 한스밴드의 ‘오락실’ 가사에 공감해 보았을 것이다. 열심히 노력한 것에 비해 낮은 점수를 받은 순간은 실망스럽기 그지 없다. 그런데 최근 시험을 망친 이유를 제시해 주는 흥미로운 연구가 환경심리학 저널 (Journal of Environmental Psycholog...
-
- [과학향기 Story] 수혈 걱정 끝… 인공혈액 시대 눈 앞에?
- 군부대나 예비군 훈련장, 대학교 근처에 세워진 헌혈차에서 사람들이 줄지어 헌혈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최근 젊은 층의 헌혈이 줄어드는 추세다. 대한적십자사에 따르면, 16~29세 사이 헌혈이 2005년 186만 7,188건에서 2023년 152만 8,245건으로 감소했다. 출산율 저하로 헌혈을 많이 하는 젊은 세대는 줄어드는데, 수혈이...
이 주제의 다른 글
- [과학향기 for Kids] 멸종된 매머드,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 [과학향기 for Kids] 종이에 베이면 왜 이렇게 아플까?
- [과학향기 Story] 프로포폴을 맞으면 왜 정신을 잃을까?
- [과학향기 Story] 수혈 걱정 끝… 인공혈액 시대 눈 앞에?
- [과학향기 Story] 인체에서 ‘알코올’이 만들어진다?
- [과학향기 for Kids] 따가운 뙤약볕으로부터 피부를 지켜라!
- [과학향기 Story] 내 안의 화를 날려 버릴 최고의 방법은?
- [과학향기 Story] 환관의 장수 비결, '생식세포'에 있다?
- [과학향기 for Kids] 데이터로 운영하는 미래 농장, 스마트 팜
- [과학향기 for Kids] 여름 불청객, ‘모기’에게 물리면 왜 가려울까?
ScienceON 관련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