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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 기절시키는 초간편 남성용 피임약
<KISTI의 과학향기> 제3841호 2023년 03월 20일임신과 출산의 책임은 사랑을 나눈 남녀가 함께 나눠야 한다. 책임 있는 사랑을 나누는 방법 중 하나가 피임이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피임 기술은 꾸준히 발달해 왔다. 알약 형태의 경구 피임약은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높였고, 여성의 사회 진출과 지위 향상을 이끌었다. 성호르몬을 조절해 임신을 막는 경구 피임약은 오랜 시간 연구가 거듭되어 오며 부작용을 거의 무시할 만한 수준으로 낮췄다. 경구 피임약은 매일 챙겨 먹어야 한다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비교적 이른 시일 안에 피임 효과가 나타나고 약을 끊으면 곧 임신이 가능해진다. 루프는 삽입 시술을 해야 하지만 한번 시술하면 따로 챙겨야 할 것이 없고, 역시 제거하면 곧 임신을 할 수 있는 상태가 된다.
한편 남성 피임법은 오랜 역사를 지닌 콘돔과 정관 수술에서 크게 변하지 않았다. 콘돔은 간편하고 성공률이 높지만, 매번 무언가를 착용한다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정관 수술은 한번 하면 이후에는 신경 쓸 일이 거의 없지만, 후에 다시 임신하고자 한다면 복원 수술을 해야 하며 성공을 100% 장담할 수 없다. 돌이키기 어려운 선택이니, 가족계획을 끝낸 커플에게나 해당하는 방법이다.
남성을 위한 다른 피임법을 찾으려는 노력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호르몬 조절을 통해 피임하려는 시도들이 있지만, 한 달에 한 개 나오는 난자의 활동을 조절하는 것에 비해 수백, 수천만의 정자의 활동을 조절하기는 훨씬 까다롭다. 또 남성은 임신하는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피임 과정의 불편이나 부작용을 참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클 수 있다. 더 안전하고 더 간편한 피임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가운데, 최근 미국 웨일코넬의과대학 연구진이 내놓은 성과가 남성 피임과 관련된 대부분의 불편과 문제를 해결할 잠재력을 가져 주목된다. 정확히는 성관계 전 간편하게 먹으면 바로 피임 효과가 나타나고, 몇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임신 능력이 회복되는 피임약으로 활용될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새로운 남성 피임약의 비결은 ‘sAC 억제’
연구팀의 방법은 정자를 몇 시간 동안 일종의 ‘기절’ 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연구진은 수용성 아데닐산 고리화효소(sAC, soluble Adenylyl Cyclase)라는 세포전달 물질에 주목했다. sAC는 유전자 발현과 효소의 활성 등을 조절하는 고리형 AMP를 합성하는 효소로, 모든 생명체에서 발견된다.
연구팀은 앞선 연구에서 유전자 조작을 통해 sAC를 제거한 쥐는 불임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어 sAC 억제제를 처방한 쥐의 정자는 헤엄쳐 이동하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물질이 정액과 함께 몸 밖으로 나온 정자의 운동 기능을 켜는 스위치인 셈이다. 세포에 에너지를 만드는 역할을 하는 sAC가 억제되면 에너지 생성도 막혀 정자가 움직일 수 없게 되는 원리다.
그림3. TDI-11861(파란색 부분)를 복용한 쥐는 정자 활동이 억제됐다. (출처: Nature communications)
또 다른 과학자들이 sAC를 만드는 유전자가 없는 남성은 다른 건강 문제는 없지만 불임이 된다는 사실을 발표한 바 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면 sAC를 억제해 안전한 피임법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연구팀은 이 성과를 바탕으로 연구를 거듭하여, sAC 억제 물질 ‘TDI-11861’을 개발했다. 이 연구 성과는 최근 학술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에 실렸다.
sAC 억제제 TDI-11861의 효과는 복용 후 30분 안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물질은 짝짓기하는 쥐의 정자 활동을 2시간 반 정도까지 막을 수 있었다. 약을 먹은 후 2시간 동안에는 100%, 3시간까지는 91%의 피임 효과를 보였다. 암컷의 생식기 안에서도 정자는 꼼짝 못 하는 상태를 유지했다. 억제제를 맞은 후 3시간이 지나자 활동성을 되찾는 정자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24시간이 지났을 무렵에는 정자 대부분이 다시 정상적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됐다. 암수 쥐 모두 특별한 부작용은 보이지 않았다.
남성 피임약, 언제 나올 수 있을까?
이 원리를 활용하여 사람이 쓸 수 있는 피임약을 만든다면 관계 1시간 전 약을 먹어 피임하고, 이후 하루가 채 가기 전에 다시 임신 기능을 회복할 수 있다는 의미다. 남성용 호르몬 피임약의 경우 복용을 중단하고 다시 임신할 수 있게 되는데 몇 주가 걸린다. 정관 수술을 받은 사람이 다시 임신하려면 복원 수술이 필요하다. 반면 웨일코넬의과대 연구팀의 방법은 성관계 직전 피임 상태가 되었다가 관계 직후 임신 가능 상태로 돌아오게 할 수 있다. 말 그대로 즉각적인 맞춤형(on-demand) 가족계획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통상 정자는 몸 밖으로 나와 4~5일 정도 생존할 수 있다. 이 방법은 정자에게 있어 가장 가혹한 환경인 질 안에 있는 동안 헤엄쳐 나가지 못하게 기절 상태로 만들어 놓기 때문에 피임 성공률을 높일 수 있다.
연구진은 이번 실험 결과를 다른 동물 실험에서도 재현하는 연구를 시행할 계획이다. 이를 통해 사람에게 더 적합한 sAC 억제제 성분을 찾는다는 목표다. 동물 실험 결과를 바탕으로 sAC가 건강한 남성의 정자의 활동성에 미치는 영향을 밝혀야 임상 실험과 상용화로 이어질 수 있다.
남성이 약국에 들러 “피임약 주세요”라고 하는 날이 올 것인지 주목된다.
글: 한세희 과학칼럼니스트/일러스트: 유진성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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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논문
Balbach, M., Rossetti, T., Ferreira, J. et al. On-demand male contraception via acute inhibition of soluble adenylyl cyclase. Nat Commun 14, 637 [2023].
https://doi.org/10.1038/s41467-023-36119-6
2023-03-20
답글 0
100% 공감할 수는 없지만 좋은 생각이기도 합니다. 인공임신중절보다 즉 낙태보다는 낫다고 생각합니다.
2023-03-20
답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