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흑사병이 우리 유전자에 남긴 흔적

<KISTI의 과학향기> 제3809호   2022년 11월 28일

2020년 초 코로나19 유행이 전 세계로 번질 때, 사람들은 신종 바이러스에 관한 정보뿐 아니라 인류 역사에서 중요하게 등장한 감염병의 이름 또한 새롭게 접했다. 그중 하나로 중세 유럽을 휩쓴 인수공통 감염병 흑사병(黑死病, plague)이 자주 언급된다. 페스트균이 원인인 이 감염병은 쥐에 기생하는 벼룩을 매개로 퍼져 5년이 채 안 되는 기간에 유럽 인구의 최대 50%를 사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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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흑사병의 원인인 페스트균(Yersinia pestis).

중세의 흑사병 유행은 문서로 남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단일 사망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사건이 인류의 몸에 남긴 흔적은 없을까?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과학계에서는 인류가 감염병과 함께 진화했음을 보이는 여러 연구를 진행해왔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최근 흑사병이 인간의 면역계를 바꾸었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페스트균에 맞선 인류의 몸에서 어떤 변화가 발견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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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1331~1351년 사이에 유럽에서 흑사병이 퍼져나간 지도(출처: wikimedia). 
 

700년 동안 묻힌 정보를 들여다보기
지난 10월 19일, 흑사병 유행이 인구 집단에 상당한 선택 압력을 가해 특정 면역 관련 유전 변이의 발생 빈도를 변화시켰다는 내용의 미국-캐나다-프랑스 국제 공동 연구팀의 논문이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소개되었다. 미국 시카고대와 캐나다 맥마스터대, 프랑스 파스퇴르연구소의 연구진들은 흑사병 감염에 따른 높은 사망률이 페스트균 감염을 피하기 위한 돌연변이의 선택압을 높여 주었을 것이라 보았다. 실제로 14세기의 대유행 이후 400년 동안 약 10년에 걸쳐 흑사병 재유행이 돌았을 때 사망률은 감소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는 페스트균에 대해 인간이 유전적으로 적응한 결과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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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 영국 런던에 있는 1348~1349년의 이스트 스미스필드 흑사병 대량 매장지. 연구팀은 이곳과 덴마크 등에서 DNA 샘플을 추출했다. (출처: MOLA, Nature) 

연구팀은 이 가설을 밝히기 위해 영국과 덴마크에 묻힌 오래된 뼈에 주목했다. 지금의 발전된 시퀀싱 기술은 살이 아닌 뼈에서 DNA 샘플을 추출, 염기서열을 분석할 수 있게 해 준다. 1340년대 후반 흑사병 사망자들이 대량으로 매장되었다고 알려진 공동묘지에서 500구 이상의 유해를 조사했고, 그중 200여 명의 치아와 뼈에서 추출한 DNA 샘플을 사망 시점에 따라 흑사병 유행이 돌기 전 사망자, 유행 중 사망자, 유행이 끝난 후 사망자로 구분했다. 면역 반응과 관련된 유전자 300여 개를 표적 시퀀싱(염기서열 분석)한 결과, 페스트 감염과 관련된 특정 유전자 네 가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유전자들은 변이체에 따라 원인균을 방어하거나 그 감수성(susceptibility)을 높이는 데 관여하는 것들이었다.

연구팀은 추려낸 유전자 중에서도 흑사병 감수성과 관련된 ‘ERAP2’에 주목했다. 면역학에서 감수성이란 숙주가 외부에서 침입한 병원체를 막지 못해 감염될 수 있는 성질을 말한다. ERAP2 유전자는 침입한 병원체를 조각내 면역 세포가 그 조각을 알아채게끔 해 감염을 막는 단백질을 생성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염기서열에서 rs254794라 명명된 변이가 발견된 사람들은 일부가 아닌 전체 길이의 ERAP2 전사체 사본을 생성할 수 있어 이런 단백질을 더 많이 만들었다. 분석에 따르면 이 변이가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흑사병에서 생존할 가능성이 40% 이상 높았다. 추가 실험에서 페스트 독성이 있고 활동 중인 인간 세포에 대해서도 변이체의 사본을 발현하는 대식세포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페스트균을 막는 데 더 효율적인 것이 확인되었다.
 
 
급작스러운 변화에 맞추어 살아남은 인류
이번 연구는 오랫동안 추측 상태에 있었던 흑사병과 인간 면역계 진화의 관계를 실험적으로 증명한 사례다. 오래된 DNA 샘플을 활용한 진화 연구는 현대인이 겪는 병의 기원과도 관련된다. 연구팀은 한때 인류를 흑사병 감염으로부터 보호한 ERAP2이 현대 사회에서 크론병과 같은 자가 면역 질환의 감수성 증가와 관련이 있다고 전한다. 맥마스터대 인류학과의 헨드릭 포이나르 교수는 ‘전염병이 인류의 게놈을 수정한 사례이지만 현대 인구 집단에서는 감지되지 않았던 사례’라고 연구의 의의를 밝히며, 면역 체계는 과거에는 훌륭하게 작동한 과잉 면역 체계가 오늘날 환경에서는 큰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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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4. 인류를 흑사병으로부터 보호한 ERAP2는 현대 인류에게는 크론병 같은 자가 면역 질환의 유발 인자가 되기도 한다. (출처: shutterstock)

인류가 집단으로 경험한 사건이 진화적으로 영향을 미친 사례는 얼마든지 더 있을 수 있다. 연구팀은 면역 관련 유전자보다 범위를 넓혀 유전체 전체를 조사하는 후속 연구를 진행할 예정이다. 가령 과거 DNA 샘플은 특정 세균에 대한 감수성에 영향을 미치는 유전적 변이가 자연선택의 결과인지를 확인시켜 준다. 루이스 바레이오 시카고대 진화의학 교수는 병원체와 인간 진화의 관계를 공식적으로 입증하는 일이 지금 우리가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를 이해하도록 한다고 말한다. 2020년대의 인류가 겪는 대유행 역시 보이지 않는 면역계의 전쟁이 새로운 변이를 오래 생존시킬지 모를 일이다.
 
 
 
글: 맹미선 과학칼럼니스트/ 일러스트: 이명헌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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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승환[사도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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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 감사합니다.

2022-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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