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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향기 Story] 수혈 걱정 끝… 인공혈액 시대 눈 앞에?
<KISTI의 과학향기> 제3083호 2024년 08월 05일군부대나 예비군 훈련장, 대학교 근처에 세워진 헌혈차에서 사람들이 줄지어 헌혈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최근 젊은 층의 헌혈이 줄어드는 추세다. 대한적십자사에 따르면, 16~29세 사이 헌혈이 2005년 186만 7,188건에서 2023년 152만 8,245건으로 감소했다. 출산율 저하로 헌혈을 많이 하는 젊은 세대는 줄어드는데, 수혈이 필요한 수술을 받을 가능성이 높은 노령 인구는 늘어나고 있어 혈액 수급은 장기적으로 더욱 악화될 것으로 보인다.
사진 1. 국민의 건강을 위해 안정적인 혈액 확보가 이뤄져야 하지만, 헌혈 인구 감소 여파로 혈액 수급 위기 상황에 몰리고 있다. ⓒshutterstock
최근 전공의 사직 등 의료 대란으로 수술 건수가 줄면서 혈액 보유량이 대폭 늘어 혈액 보유일수도 적정 수준인 5일 이상으로 올라섰다. 하지만 이는 일시적 현상이고, 사태가 안정화되면 다시 혈액 수급 위기 상황에 몰릴 수 있다고 우려한다. 큰 부상이나 수술에 대비한 안정적 혈액 확보는 국민 건강에 꼭 필요하지만, 사람들의 자발적 헌혈에 의존해야 한다는 점에서 수급 불안 요소가 크다.
이에 의학계와 과학계에선 혈액을 대체할 ‘인공혈액’ 기술에 꾸준히 관심을 두고 연구를 이어 왔다. 수혈 때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혈액형의 원리가 밝혀지기 이전인 19세기 후반 미국에선 산부인과 수술을 하는 환자에게 혈액 대신 우유를 주입하는 기법이 첨단 치료법으로 주목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간 ‘생명의 상징’으로 여겨왔던 피는 대체물을 만들려는 과학의 접근을 쉽사리 허락하지 않았다.
헤모글로빈 캡슐로 산소 운반 기능 구현
최근 일본 나라현립 의과대학교에서 혈액형에 상관없이 수혈할 수 있는 인공혈액을 개발해냈다. 연구진은 2030년 의료 현장 투입을 목표로 내년 3월 임상 실험에 들어간다. 이 인공혈액을 누구에게나 수혈할 수 있는 비결은 보관 기한이 지나 폐기할 혈액에서 적혈구 속 헤모글로빈만 추출해 작은 지질막으로 감싼 ‘헤모글로빈 캡슐’에 있다.
사진 2. 일본 나라현립 의과대학교는 폐기 예정인 혈액에서 헤모글로빈을 추출해 인공혈액을 제조해냈다. ⓒ나라현립의과대학교
적혈구 주요 성분인 헤모글로빈은 혈관을 따라 신체 곳곳에 산소를 공급한다. 다만 헤모글로빈은 조직에 산화를 일으키는 유독 성분이기도 하다. 이에 헌혈로 확보한 혈액은 저온에서 보관해도 30일 후에는 적혈구 바깥쪽 세포막이 훼손돼 헤모글로빈이 노출된다. 그 결과, 노출된 헤모글로빈의 독성 때문에 혈액을 사용할 수 없게 된다.
연구진은 이렇게 버려지는 혈액에서 헤모글로빈을 추출해 인공 막으로 감싼 산소 수송 수단을 만들어냈다. 적혈구 세포막이 아니라 인공 지질막으로 헤모글로빈을 감싸기 때문에 보관 기한을 실온에선 2년, 냉장해 보관하면 5년까지 늘일 수 있다. 또 혈액형이 다른 사람에게 수혈할 때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항원이 적혈구 막 표면에 있는데, 이 인공혈액은 적혈구가 없으므로 항원도 없어 혈액형에 무관하게 투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인공 혈액으로 인류 보건 증진
물론 이는 엄밀히 말하면 인공혈액이 아닌 ‘헤모글로빈 기반 산소 수송체(HBOC)'이며, 헌혈을 통해 확보한 혈액 재고가 우선 돼야 한다는 한계는 있다. 하지만 보관 기간이 짧고 혈액형이 맞는 피를 찾아야 한다는 현재 수혈의 문제점을 해결해 더 많은 환자의 생명을 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한편, 미국에서도 비슷한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미국 메릴랜드대학교 의과대학의 의사과학자 앨런 닥터가 주도해 개발 중인 ‘에리스로머(Erythromer)’가 대표적이다. 이 프로젝트는 지난해 미국 국방부 고등연구계획청(DARPA)으로부터 4600만 달러의 지원을 받았다. 액체 형태인 나라현립 의과대학의 HBOC와 달리 에리스로머는 동결 건조한 분말 형태라 더 좁은 공간에서 더 오래 보관할 수 있다. 에리스로머 역시 아직 동물 실험 단계로, 일본에 인체 대상 임상 선수를 빼앗겼다.
사진 3. 미국과 일본에서 개발하고 있는 HBOC는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할 것으로 기대된다. ⓒshutterstock
미국과 일본 등에서 이뤄진 HBOC 분야 기술 진척은 수혈과 관련된 의료 문제를 상당 부분 해결할 전망이다. 예시로 대규모 전투가 벌어져 부상병이 폭증할 때 많은 이의 목숨을 구할 수 있게 된다. 또한 희귀 혈액형 환자가 안심하고 수술을 받을 수 있게 되고, 예상 밖의 대형 참사 희생자나 늘어나는 노년층 인구에도 적시에 안정적으로 혈액을 공급할 수 있기에 국민 보건 안보에도 도움이 된다. 물론 인공혈액을 완전히 새롭게 만들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지만, 혈액의 기능을 대체할 방법을 찾아냄으로써 인류 보건을 증진하는 날은 보다 가까이 다가온 듯하다.
글 : 한세희 과학 칼럼니스트, 그림 : 유진성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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