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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향기 Story] 인체에서 ‘알코올’이 만들어진다?
<KISTI의 과학향기> 제3081호 2024년 07월 29일“한 잔 먹세 그려/ 또 한 잔 먹세 그려/ 꽃을 꺾어 세어가며/ 무진무진 먹세 그려”
-송강 정철, ‘장진주사 (將進酒辭)’ 일부
가사 문학의 대가인 송강 '정철'은 관동별곡에서도 ‘북두칠성을 국자 삼아’ 바닷물 같은 술을 마신다고 표현할 만큼 당대 소문난 애주가로 꼽힌다. 그에게 술이란 당쟁에 지친 심신과 세상의 허무함을 풀어놓을 유일한 친구이자, 수많은 명문장을 짓는데 영감을 주는 수단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술을 끼고 살았던 송강이 술을 먹지 않아도 몸에서 알코올이 만들어지는 ‘자동양조증후군(Auto-brewery syndrome, ABS)’에 걸렸다면 어땠을까?
탄수화물이 알코올로 바뀌는 희귀질환이 있다?
지난 4월, 로이터 통신은 음주단속에 걸린 40대 후반의 남성이 술을 마시지 않아도 몸에서 알코올이 생성되는 질환을 앓고 있어 무죄 판결을 받았다는 소식을 보도했다. 그의 정확한 병명은 ‘자동양조증후군’이다. 자동양조증후군은 장 속 미생물이 체내로 유입된 탄수화물을 알코올로 발효시키는 희귀질환이다. 전 세계에 공식 보고된 사례가 100건 미만인 만큼 아직 명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보고된 바에 따르면 맥주를 만들 때 사용되는 천연 효모 ‘사카로미세스(Saccharomyces)’와 인체에 서식하는 효모 ‘칸디다(Candida)’ 등 두 균류가 과하게 증식한 탓이라고 알려져 있다.
사진 2. 자동양조증후군의 명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효모의 일종인 사카로미세스와 칸디다가 과하게 증식한 탓이라고 알려져 있다. ⓒshutterstock
자동양조증후군 환자는 대사과정, 즉 탄수화물을 에너지로 분해하는 과정에서 생성된 알코올을 체내에 가지고 있어 술을 마신 것과 같은 증상을 겪는다. 대표적으로 환자의 몸에서 알코올 향이 나고, 기분 변화와 더불어 졸음, 균형감각 상실, 불안정한 보행과 같은 증상을 보인다. 로이터 통신에서 보도한 사례의 주인공 역시, 음주 측정 당시 혈중알코올농도가 0.2%로 만취 상태의 취객과 다를 바 없었다.
자동양조증후군 질환자, 드물지 않을지도…
해당 증후군이 처음 보고된 것은 1912년이다. 다만, 당시엔 이 증후군에 관한 정보가 적어 병리학적으로 진단되진 않았다. 그러다 1949년, ‘영국의학저널(British Medical Journal)’ 4월호에 이 증상에 대한 최초의 임상 기록이 남아있지만, 자동양조증후군으로 진단되지 않고 ‘어린이 위장 파열’이라고 보고됐다.
해당 논문에 의하면, 음주 이력이 없는 5세 아동이 알코올로 추정되는 액체와 가스에 의한 위장 파열로 사망했다고 기록돼 있다. 당시 의료진은 환자가 저녁으로 먹은 고구마 때문에 알코올 성분이 발생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고구마 속에는 아마이드(amide)라는 성분이 포함돼 있으며, 이는 장에서 발효를 일으킨다. 의료진은 발효과정에서 만들어진 가스로 인해 위장이 손상됐다고 추측한 셈이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일본과 미국에서 잇따라 자동양조증후군 사례가 보고되면서 전문가들은 ‘숨겨진 환자’가 더 많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 대부분은 음주 상태로 오해받거나, 자동양조증후군으로 인해 위궤양, 지방간과 간경화, 뇌전증 및 뇌출혈 등이 진행된 후에나 병원을 찾기 때문이다. 단국대학교의과대학부속병원 김의진 내과전문의 역시 “알코올을 섭취한 적 없는 환자가 술에 취한 사람 같은 행동을 보이거나, 원인을 알 수 없는 간질환자의 경우 정확한 원인 감별을 위해 자동양조증후군의 가능성을 열어둘 필요가 있다”고 대한내과학회에 보고한 바 있다.
미국 앨라바마대학교 위장내과 파하드 말릭 전문의는 “환자들은 이런 증상이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데다, 주변으로부터 조롱을 당하므로 새로운 사례 연구에 참여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비록 진단 사례가 적고 연구가 어렵지만, 난치성 질환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알코올 생성 인위적으로 억제할 수 있어
맥주, 와인, 증류주 속 알코올은 효모가 탄수화물의 당을 발효시켜야만 만들어진다. 즉 효모와 탄수화물이 없다면 알코올 생성을 억제할 수 있다는 의미다. 실제로 이 원리를 이용해 자동양조증후군 증상 개선에 성공한 사례가 속속히 발표되고 있다. 미국 리치먼드대학병원에선 자동양조증후군 환자에게 저탄수화물 식단과 항진균제 처방을 통해 증상을 완화했다고 의학 저널 ‘큐레우스(Cureus)’에 발표했다. 즉 효모 성장에 필요한 영양분을 제한하고, 항진균제로 장 속 효모를 제거함으로써 체내 알코올 생성을 억제하는 데 도움이 된 것이다.
캐나다 토론토대학교 감염의학과 라헬 제우데 전문의 역시 이러한 치료법이 자동양조증후군 환자의 말 더듬기와 현기증 증상을 줄이는 데 도움 됐다고 말했다. 다만 어떤 효모가 자동양조증후군에 관여하는지, 효모균의 급격한 증가가 원인이라는 구체적인 임상 증거가 없다. 이에 자동양조증후군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숙제로 남아있다. 그럼에도 식이요법과 약물 치료를 통해 치료 사례가 늘어나는 오늘날, 환자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도록 이 증후군에 대한 관리가 꾸준히 이어질 필요가 있다.
알코올을 만드는 자동 양조증후군!
KISTI의 과학향기
글 : 김현정 과학 칼럼니스트, 그림 : 이명헌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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