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학향기 Story
- 스토리
스토리
[과학향기 Story] 프로포폴을 맞으면 왜 정신을 잃을까?
<KISTI의 과학향기> 제3085호 2024년 08월 12일“약 들어갑니다. 1부터 세어보세요.”
건강검진 할 때 수면내시경을 선택했다면, 어김없이 숫자를 세야 한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이번엔 잠들지 않고 버텨보겠다'는 이상한 의지를 불태우기도 한다. 하지만 셋을 채 세기도 전에 잠이 들고, 정신을 차려보면 내시경은 이미 끝난 상태다. 그 누구라도 찰나에 스르륵 의식을 잃게 만드는 주사의 정체는 바로 ‘프로포폴’이다.
사진 1. 우유 주사라고도 불리는 프로포폴은 효과가 빠른 수면마취제다. ⓒshutterstock
수면마취 중 ‘헛소리’하는 이유는?
프로포폴은 전 세계에서 수면내시경이나 시술, 진통 등에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전신마취제다. 기름에 잘 녹는 지용성 물질로 세포막을 쉽게 통과한다. 그래서 몸에 잘 흡수되며 효과도 빠르게 나타난다. 성인 몸무게 기준으로 1kg 당 1.5~2.5mg을 투여하면 1분 이내에 잠이 들고, 이 효과는 5분 동안 지속된다고 알려져 있다. 프로포폴은 다른 조직으로 빨리 퍼져 나가기 때문에 몸에 쌓이지 않고 회복이 빠르다는 장점이 있다. 물에 잘 녹지 않아 대두유에 섞어서 사용하며, 대두유에 섞은 프로포폴은 불투명한 흰색을 띠어 ‘우유주사’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일반적인 수면과 달리 프로포폴에 의한 수면은 의식이 절반 정도 깨어 있는 ‘의식하 진정’ 상태를 유지한다. 이는 약물을 이용해 최소한의 의식만을 진정시킨 상태를 뜻한다. 환자는 자발적으로 호흡할 수 있고, 물리적 자극에도 언제든 반응을 보인다. 그래서 프로포폴을 투여한 후에도 의사의 질문에 답변할 수 있다. 예능 방송에서 내시경 검사를 받는 출연자가 잠에서 깨지 않은 채 엉뚱한 말을 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의식하 진정 상태에선 신체적 불쾌감과 통증도 느낄 수 있지만, 회복 단계에서 이러한 기억은 지워진다.
사진 2. 프로포폴을 맞은 환자는 의식이 절반 정도 깨어 있는 ‘의식하 진정’ 상태를 유지한다. 그래서 외부 자극에도 반응할 수 있다. ⓒshutterstock
혈관을 따라 퍼져 나가는 프로포폴은 신경전달물질이자 뇌 인지 기능의 핵심물질인 가바(GABA) 수용체와 결합한다. 이후 신경세포(뉴런)을 억제해 뇌의 흥분자극은 줄이고, 진정을 돕는다. 다만 프로포폴이 무의식을 유도하는 방법은 완벽히 밝혀지지 않았다.
프로포폴, ‘뉴런 활동 억제’해
최근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교(MIT)의 얼 K. 밀러 교수 연구팀은 프로포폴이 ‘동적 안정성’ 메커니즘을 방해해 무의식 상태를 유발한다고 과학 저널 뉴런(Neuron)에 발표했다. 동적 안정성은 신경세포가 외부의 새로운 반응에 흥분하면, 빠르게 통제력을 되찾고 과도하게 흥분하는 것을 막아주는 것을 말한다.
기존 연구에선 프로포폴이 신경세포를 진정시켜 무의식 상태를 유도한다고 추정했다. 그런 한편, 뇌가 너무 흥분해 혼란스러운 상태로 이어져 의식을 잃는다는 주장도 나왔다. 연구팀은 이렇게 상반된 연구 결과가 나오는 것은 뇌의 동적 안정성을 측정하기 어렵기 때문으로 분석했다. 이에 연구팀은 정확한 연구를 위해 전기신호로 뉴런 활동을 분석하는 '안정성 추정을 위한 지연 선형 분석'(DeLASE) 기술을 개발했다. 연구팀은 원숭이에게 프로포폴을 투여한 뒤, DeLASE 기술을 활용해 1시간 동안 시각, 청각, 공간 인식, 실행 기능 등 뇌 피질의 4개 영역을 분석했다.
사진 3. 프로포폴을 투여할 경우, 뇌의 신경세포가 지나치게 흥분 상태를 유지하며 안정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 즉 프로포폴이 뉴런 활동을 억제하면 뇌의 불안정성이 커지고 의식을 잃게 되는 것이다. ⓒNeuron
그 결과, 정상적으로 깨어 있는 상태에선 외부에서 어떤 자극이 가해져도 신경 활동은 급증했다가 안정적인 상태로 돌아갔다. 반면, 프로포폴을 투여하자 뇌의 신경세포가 지나치게 흥분한 상태를 유지했고, 뇌가 원 상태로 돌아가는 데도 더 오랜 시간이 소요됐다. 이러한 경향은 동물이 의식을 잃을 때까지 점점 두드러졌다. 연구팀은 프로포폴이 뉴런 활동을 억제하면, 뇌의 불안정성이 커지면서 의식을 잃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또한 연구팀은 신경망 모델로 이 과정을 시뮬레이션했다. 신경망 모델에서도 신경망의 특정 지점의 활성을 억제할수록 신경망 활동이 불안정해졌다. 연구진은 “뉴런을 억제할수록 신경망이 안정화되는 것이 아닌, 뇌의 불안정성을 유발한다”고 말했다. 이어 “프로포폴이 흥분된 신경을 억제하면, 이 활동이 다른 억제 뉴런을 억제하면서 뇌 활동이 증가하게 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연구를 이끈 밀러 교수는 “뇌는 뉴런이 서로 영향을 미칠 만큼 흥분해야 하지만, 너무 흥분하면 혼란에 빠지게 된다”며 “프로포폴은 그 좁은 작동 범위를 유지하는 메커니즘을 방해한다”고 전했다. 연구팀은 “앞으로 마취제들의 작동 메커니즘을 찾아낸다면, 마취제를 좀 더 안전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번 연구에선 기존 가설을 넘어 프로포폴이 무의식 상태를 유발하는 방식을 밝혀냈다. 이를 바탕으로 환자들에게 더욱 안전하고 효과적인 마취제가 개발될 수 있길 기대해본다.
글 : 이윤선 과학칼럼니스트, 일러스트 : 이명헌 작가

추천 콘텐츠
인기 스토리
-
- 저주파 자극기, 계속 써도 괜찮을까?
- 최근 목이나 어깨, 허리 등에 부착해 사용하는 저주파 자극기가 인기다. 물리치료실이 아니라 가정에서 손쉽게 쓸 수 있도록 작고 가벼울 뿐만 아니라 배터리 충전으로 반나절 넘게 작동한다. 게다가 가격도 저렴하다. SNS를 타고 효과가 좋다는 입소문을 퍼지면서 판매량도 늘고 있다. 저주파 자극기는 전기근육자극(Electrical Muscle Stimu...
-
- 우리 얼굴에 벌레가 산다? 모낭충의 비밀스러운 삶
- 썩 유쾌한 얘기는 아니지만, 우리 피부에는 세균 같은 각종 미생물 외에도 작은 진드기가 살고 있다. 바로 모낭충이다. 모낭충은 인간의 피부에 살면서 번식하고, 세대를 이어 간다. 태어난 지 며칠 되지 않은 신생아를 제외한 거의 모든 사람의 피부에 모낭충이 산다. 인간의 피부에 사는 모낭충은 크게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주로 얼굴의 모낭에 사는...
-
- [과학향기 Story] 차 한 잔에 중금속이 줄었다? 찻잎의 숨겨진 능력!
- 하루하루 바쁘게 사는 현대인들은 잠을 깨우기 위해 커피를 마신다. 이에 커피 소비량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지만, 아직 커피의 소비량은 ‘차(茶)’의 소비량을 뛰어넘지 못했다. 이는 많은 국가에서 차를 일상적으로 소비하는 문화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카페인 외에도 다양한 성분이 함유돼 있어, 건강을 목적으로 섭취하는 사람들도 다수 존재한다. ...
이 주제의 다른 글
- [과학향기 for Kids] 나무 뗏목 타고 8000km 항해? 태평양을 건넌 이구아나의 대모험
- [과학향기 Story] '디저트 배'는 진짜였다! 당신 뇌 속의 달콤한 속삭임
- [과학향기 for kids] 추위에도 끄떡없어! 북극곰의 털이 얼어붙지 않는 비결은?
- [과학향기 Story] 죽음을 초월한 인간, 《미키17》이 던지는 질문
- [과학향기 for kids] 사람 근육으로 움직이는 로봇 손 등장!
- [과학향기 Story] 인간의 뇌, 와이파이보다 느리다니?
- [과학향기 for Kids] 귓바퀴의 조상은 물고기의 아가미?
- [과학향기 Story] 하루 한 두 잔은 괜찮다더니… 알코올, 암 위험 높이고 건강 이점 없어
- [과학향기 for Kids] 잘 모를 때 친구 따라 하는 이유!
- [과학향기 for Kids] 한 달 동안 똥을 참는 올챙이가 있다?
ScienceON 관련논문
놀랍습니다. 유용한 정보 감사합니다!
2024-08-17
답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