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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위한 시간, 잠
<KISTI의 과학향기> 제2290호 2014년 12월 29일
"나는 잠들어 있는가 깨어 있는가. 누구, 내가 누구인지 말해 줄 수 있는 자 있는가 없는가."
(셰익스피어, ‘리어왕’)
잠은 왜 잘까? 낮 동안 깨어 활동할 힘을 얻는 쉬는 시간일까? 최근 연구 결과를 보면 잠은 단순히 몸을 쉬게 하는 소극적인 휴식이 아니다. 뇌를 일깨우고 다음 날 다시 새로운 기억을 저장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적극적인 정신 활동이기 때문이다.
잠은 뇌가 낮 동안 수집한 기억을 정리하는 시간이다. 잠은 크게 렘(REM) 수면과 비(非) 렘(non-REM) 수면으로 나눌 수 있다. 이 가운데 깊은 수면을 의미하는 비렘 수면 중에는 느린 뇌파 수면 일명 ‘서파 수면(slow-wave sleep)’이라는 단계가 있다. 대뇌피질에서 약 1Hz 정도의 느린 뇌파가 뇌 전반에 흐르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흥미롭게도 잠을 자지 않고 깨어 있을 때 뇌가 어떤 활동을 하고 나면, 바로 그 부위에서 이 뇌파가 특히 늘어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연구자들은 이 뇌파가, 낮 동안 활동하면서 얻은 기억을 뇌가 ‘처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고 본다. 즉 뇌는 낮에 여러 가지 활동을 통해 새로운 기억을 얻고, 밤에는 이 기억을 편집하거나 기억 중추(해마)에 전달해 저장한다는 것이다.
낮 동안 어떤 사건의 동영상을 촬영했다고 생각해 보자. 촬영이 끝나면 용량이 큰 파일을 하나 얻겠지만, 그 안에는 온갖 불필요한 부분이 섞여 있고 내용도 뒤죽박죽이라 결코 제대로 된 영상이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촬영 뒤에는 항상 불필요한 부분을 지우고 중요한 부분은 강조하는 편집 작업이 필요하다. 나중에 찾기 좋게 내용을 분류하고 저장하는 과정도 필요하다.
기억도 마찬가지인데, 뇌가 기억을 편집하고 저장하는 시간이 바로 잠을 자는 시간이다. 실제로 전체 수면 시간 중 서파 수면 시간 비중이 늘어나면 잠의 질이 높아지고 기억도 잘 하게 된다. 2013년 1월 ‘네이처 뉴로사이언스’에 실린 미국 UC버클리 브라이스 맨들러 박사팀의 연구 결과를 보면, 젊은이가 어른보다 기억력이 좋은 이유 중 하나도 서파 수면 때문이다. 이마 부분에 위치한 뇌의 전전두엽 부위가 서파 수면과 관련이 있는데, 나이가 들면 이 부위가 퇴화해 질 좋은 서파 수면을 누리지 못하고, 기억력도 줄어든다.
혹시 어른도 인공적으로 서파 수면 시간을 늘려 주면 기억력이 좋아질 수 있을까. 같은 달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실제로 뇌에 전극을 꽂아 인공 서파를 만들어 주는 연구가 있고, 그 중 일부는 기억력이 개선되는 효과를 얻기도 했다. 하지만 꼭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잠을 푹 깊이 잘 수만 있다면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교 켄 팔러 교수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전극을 쓰지 않더라도 운동 등 잠을 푹 잘 수 있게 할 방법은 많다."라고 했다. 기억력 감퇴가 의심스럽다면 먼저 잠을 편히 잘 잘 수 있는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보자.
왜 잠을 잘 자야 기억력이 좋아지는지를 설명하는 또 다른 설명도 있다. ‘시냅스(뇌세포 사이의 연결) 항상성’이라는 가설은 잠을 칠판지우개와 같은 존재로 본다. 잠을 통해 시냅스가 새로운 기억을 받아들이도록 ‘리셋’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미국 위스콘신 대학교 의대 치아라 키렐리 교수팀은 2011년 6월, 초파리의 시냅스가 잠을 자면 더 작아진다는 사실을 밝혀내 그 결과를 ‘사이언스’에 발표했다.
시냅스는 낮에 활동을 하면 수가 늘어나고 크기도 커진다. 기억이 새로 만들어져 시냅스의 형태로 기록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한정 커질 수는 없으므로, 적당한 시기에 불필요한 시냅스를 정리해 새로운 기억을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한다. 그게 바로 밤에 잠을 자는 이유라는 것이다. 키렐리 교수팀은 초파리에서 밤에 시냅스를 줄이는 역할을 하는 유전자까지 찾아내, 이 가설에 한층 힘을 실어줬다.
잠을 통해 기억을 없앨 수 있다면, 혹시 나쁜 기억을 없애는 수면 처방에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잠의 편집 기능은 수면 의학자들의 큰 관심을 끌고 있다. 특히 기억력을 높이는 서파 수면은 나쁜 기억을 없애는 기억의 ‘청소부’ 역할도 해 중요한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교 의대 카테리나 하우너 박사팀은 서파 수면 처방을 통해 나쁜 기억에 시달리는 환자의 기억을 지울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2013년 9월 ‘네이처 뉴로사이언스’ 온라인판에 발표했다. 연구팀은 냄새가 기억과 관련이 깊다는 사실을 이용했다. 공포 기억을 지닌 사람에게 그 기억과 연관이 있는 냄새 자극을 주고 서파 수면 처방을 했더니, 서파 수면 처방을 하지 않은 사람에 비해 공포를 빨리 잊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연구팀은 해마와 같은 기억과 관련이 있는 뇌 영역의 활동에도 변화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 뇌가 이 과정에 깊숙하게 관여한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기억은 단순히 암기력에 관련되는 두뇌 능력이 아니다. 기억을 통해 우리는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 만약 기억이 사라진다면 극단적으로는 소설 <박사가 사랑한 수식> 속 박사처럼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잠 덕분에 우리는 늘 새로운 활동을 계획하고 기억을 받아들일 수 있다. 잠은 삶의 3분의 1을 잠식하는 불필요한 존재가 아니라, 남은 시간을 새로운 기억으로 충만하게 만드는 삶의 필수 요소다.
글 : 윤신영 과학동아 기자
(셰익스피어, ‘리어왕’)
잠은 왜 잘까? 낮 동안 깨어 활동할 힘을 얻는 쉬는 시간일까? 최근 연구 결과를 보면 잠은 단순히 몸을 쉬게 하는 소극적인 휴식이 아니다. 뇌를 일깨우고 다음 날 다시 새로운 기억을 저장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적극적인 정신 활동이기 때문이다.
잠은 뇌가 낮 동안 수집한 기억을 정리하는 시간이다. 잠은 크게 렘(REM) 수면과 비(非) 렘(non-REM) 수면으로 나눌 수 있다. 이 가운데 깊은 수면을 의미하는 비렘 수면 중에는 느린 뇌파 수면 일명 ‘서파 수면(slow-wave sleep)’이라는 단계가 있다. 대뇌피질에서 약 1Hz 정도의 느린 뇌파가 뇌 전반에 흐르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흥미롭게도 잠을 자지 않고 깨어 있을 때 뇌가 어떤 활동을 하고 나면, 바로 그 부위에서 이 뇌파가 특히 늘어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연구자들은 이 뇌파가, 낮 동안 활동하면서 얻은 기억을 뇌가 ‘처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고 본다. 즉 뇌는 낮에 여러 가지 활동을 통해 새로운 기억을 얻고, 밤에는 이 기억을 편집하거나 기억 중추(해마)에 전달해 저장한다는 것이다.
낮 동안 어떤 사건의 동영상을 촬영했다고 생각해 보자. 촬영이 끝나면 용량이 큰 파일을 하나 얻겠지만, 그 안에는 온갖 불필요한 부분이 섞여 있고 내용도 뒤죽박죽이라 결코 제대로 된 영상이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촬영 뒤에는 항상 불필요한 부분을 지우고 중요한 부분은 강조하는 편집 작업이 필요하다. 나중에 찾기 좋게 내용을 분류하고 저장하는 과정도 필요하다.
기억도 마찬가지인데, 뇌가 기억을 편집하고 저장하는 시간이 바로 잠을 자는 시간이다. 실제로 전체 수면 시간 중 서파 수면 시간 비중이 늘어나면 잠의 질이 높아지고 기억도 잘 하게 된다. 2013년 1월 ‘네이처 뉴로사이언스’에 실린 미국 UC버클리 브라이스 맨들러 박사팀의 연구 결과를 보면, 젊은이가 어른보다 기억력이 좋은 이유 중 하나도 서파 수면 때문이다. 이마 부분에 위치한 뇌의 전전두엽 부위가 서파 수면과 관련이 있는데, 나이가 들면 이 부위가 퇴화해 질 좋은 서파 수면을 누리지 못하고, 기억력도 줄어든다.
혹시 어른도 인공적으로 서파 수면 시간을 늘려 주면 기억력이 좋아질 수 있을까. 같은 달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실제로 뇌에 전극을 꽂아 인공 서파를 만들어 주는 연구가 있고, 그 중 일부는 기억력이 개선되는 효과를 얻기도 했다. 하지만 꼭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잠을 푹 깊이 잘 수만 있다면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교 켄 팔러 교수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전극을 쓰지 않더라도 운동 등 잠을 푹 잘 수 있게 할 방법은 많다."라고 했다. 기억력 감퇴가 의심스럽다면 먼저 잠을 편히 잘 잘 수 있는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보자.
왜 잠을 잘 자야 기억력이 좋아지는지를 설명하는 또 다른 설명도 있다. ‘시냅스(뇌세포 사이의 연결) 항상성’이라는 가설은 잠을 칠판지우개와 같은 존재로 본다. 잠을 통해 시냅스가 새로운 기억을 받아들이도록 ‘리셋’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미국 위스콘신 대학교 의대 치아라 키렐리 교수팀은 2011년 6월, 초파리의 시냅스가 잠을 자면 더 작아진다는 사실을 밝혀내 그 결과를 ‘사이언스’에 발표했다.
시냅스는 낮에 활동을 하면 수가 늘어나고 크기도 커진다. 기억이 새로 만들어져 시냅스의 형태로 기록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한정 커질 수는 없으므로, 적당한 시기에 불필요한 시냅스를 정리해 새로운 기억을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한다. 그게 바로 밤에 잠을 자는 이유라는 것이다. 키렐리 교수팀은 초파리에서 밤에 시냅스를 줄이는 역할을 하는 유전자까지 찾아내, 이 가설에 한층 힘을 실어줬다.
잠을 통해 기억을 없앨 수 있다면, 혹시 나쁜 기억을 없애는 수면 처방에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잠의 편집 기능은 수면 의학자들의 큰 관심을 끌고 있다. 특히 기억력을 높이는 서파 수면은 나쁜 기억을 없애는 기억의 ‘청소부’ 역할도 해 중요한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교 의대 카테리나 하우너 박사팀은 서파 수면 처방을 통해 나쁜 기억에 시달리는 환자의 기억을 지울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2013년 9월 ‘네이처 뉴로사이언스’ 온라인판에 발표했다. 연구팀은 냄새가 기억과 관련이 깊다는 사실을 이용했다. 공포 기억을 지닌 사람에게 그 기억과 연관이 있는 냄새 자극을 주고 서파 수면 처방을 했더니, 서파 수면 처방을 하지 않은 사람에 비해 공포를 빨리 잊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연구팀은 해마와 같은 기억과 관련이 있는 뇌 영역의 활동에도 변화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 뇌가 이 과정에 깊숙하게 관여한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기억은 단순히 암기력에 관련되는 두뇌 능력이 아니다. 기억을 통해 우리는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 만약 기억이 사라진다면 극단적으로는 소설 <박사가 사랑한 수식> 속 박사처럼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잠 덕분에 우리는 늘 새로운 활동을 계획하고 기억을 받아들일 수 있다. 잠은 삶의 3분의 1을 잠식하는 불필요한 존재가 아니라, 남은 시간을 새로운 기억으로 충만하게 만드는 삶의 필수 요소다.
글 : 윤신영 과학동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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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기모찌
2016-06-12
답글 0
잘 보고 갑니다....잠
2015-01-05
답글 0
유익한 정보 감사합니다^^
알면서도 실천을 잘하지 못하는 거 같아서 다소 아쉽습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15-01-02
답글 0
그래서 요즘 내 기억력이 엉망이 되어가는거였어 ㅠ
2014-12-29
답글 0
잠은 뇌를 쉬게 하는 시간일줄 알았는데 하루 일을 정리하는 시간이군요 잠은 푸욱 자야 다음날 몸과 마음이 가픈해 진다는데..... 좋은 내용 끝까지 잘 읽었습니다
2014-12-29
답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