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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알 굴리면 공포 기억이 사라진다?
<KISTI의 과학향기> 제3315호 2019년 03월 11일우리는 많은 것을 쉽게 잊어버리면서 어떤 것들은 끝내 잊지 못하기도 한다. 그 잊히지 않는 기억 중에는 두려움을 일으키며 우리를 괴롭히는 것들도 있다. 특히 생명에 위협을 느낄 정도의 심각한 공포를 경험한 기억은 개인의 정신에 깊고도 오랜 상처를 남긴다. 사고나 재해를 경험 혹은 목격한 사람들이 일상적인 상황에서도 이전의 끔찍한 기억을 반복적으로 떠올리며 극심한 불안 증세를 보이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가 이런 경우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치료하기 위한 방법은 당연하게도 과거의 공포스러운 기억을 지워내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동물 모델에서는 화학물질을 주입해 공포 기억을 구성하고 있는 뉴런(neuron)과 시냅스(synapse)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 위험천만한 방법을 인간 환자에게 적용하는 것은 용인되지 않는다.
확실하지만 리스크가 큰 이 방법 대신 정신의학자들이 선택한 치료법 중 하나는 ‘안구운동 민감소실 및 재처리 요법(EMDR, eye movement desensitization and reprocessing)’이다. 환자에게 공포 기억을 회상시킴과 동시에 양쪽에서 번갈아 가며 나타나는 자극(ABS, alternating bilateral sensory stimulation)(이하 ‘양측성 시각 자극’)에 주목하게 함으로써 공포 기억에 둔감해지도록 유도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이 치료법 역시 임상 현장에서 외면 받고 있다. 효과가 있음은 분명하지만 대체 왜 효과가 있는지 밝혀진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난 2월 학술지 네이처(Nature)에 게재된 정재승 박사 연구팀의 논문은 그 ‘왜’에 대한 답을 내놓았다. 생쥐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양측성 시각 자극이 공포 반응을 감소시키는 효과가 있음을 재확인하고, 양측성 시각 자극이 신경계에 수용되어 공포 반응이 조절되기까지의 신경회로를 발견하였다.
눈의 움직임으로 공포 반응을 억제할 수 있다
연구팀은 생쥐에게 특정 소리와 전기 자극을 반복적으로 줌으로써 생쥐가 해당 소리만 듣고도 전기 자극의 공포를 떠올리도록 학습시킨 후, 생쥐의 공포 반응(freezing, 두려움에 몸이 얼어붙는 반응)이 어떤 자극하에서 줄어드는지를 관찰했다.
그 결과 조건 자극과 함께 양측성 시각 자극(빛)이 동시에 주어지자 생쥐는 시각 자극에 주의를 기울이며 좌우로 눈을 움직였고, 공포 반응은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일주일 후 다시 그 소리에 노출되어도 공포 반응이 재발하지 않을 정도로 그 효과가 오래 지속되었다.
다른 자극들이 주어졌을 때는 이와 같은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조건 자극을 생쥐에게 반복적으로 노출시킨 경우에도 공포 반응이 줄어들었지만 양측성 시각 자극이 함께 주어질 때보다는 더디게 감소했고 일주일 후 공포 반응이 재발했다.
이처럼 공포 기억을 연상시키는 자극에 반복적으로 노출시킴으로써 그 자극에 대한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내는 방식은 전통적인 트라우마 치료법인데, 이 실험을 통해 이 전통적인 치료법으로는 지속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없음이 드러난 셈이다. 이외에 조건 자극과 양측성 시각 자극이 동시에 주어지지 않은 경우, 시각 자극이 양쪽에서 번갈아 나타나지 않고 계속 나타나 있거나 동시에 나타나는 경우에는 생쥐의 공포 반응이 전혀 감소하지 않거나 일시적으로만 감소했다.
새로운 신경회로의 발견: 상구-중앙 내측 시상핵-편도체로 이어지는 공포 처리반
이 실험의 결과는 안구운동 민감소실 및 재처리 요법의 효과를, 양측성 시각 자극을 이용해 안구운동을 조절함으로써 공포 기억을 치료할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해주었다. 다음으로 연구팀은 ‘양측성 시각 자극’과 ‘공포 반응의 감소’ 사이의 인과적인 연결고리들을 찾는 작업에 몰두했다.
그들은 시신경 내의 신경섬유 일부로부터 신호를 받으면서 안구운동과 주의집중을 조절하는 뇌 영역인 상구(superior colliculus)가 양측성 시각 자극이 공포 반응을 조절하는 과정을 매개할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고, 이를 검증하는 데 성공했다. 최종적으로는 양측성 시각 자극이 (1) 상구의 뉴런들을 자극해 활성화시키고 (2) 그 신호가 중앙 내측 시상핵(mediodorsal thalamus)을 거쳐 (3) 기저측 편도체(basolateral complex of the amygdala)에서 공포 반응을 억제하는 새로운 신경회로를 발견해냈다.
이미 신경과학 분야에서 잘 알려져 있다시피 편도체는 공포 반응을 조절하는 뇌 영역으로, 공포 반응을 담당하는 부분과 공포를 해소시키는 반응을 담당하는 부분을 모두 가지고 있다.
이 연구에서는 양측성 시각 자극이 편도체 내 공포 반응을 담당하는 부분을 억제한다고 보고했다. 다른 자극하에서보다 양측성 시각 자극이 주어졌을 때 해당 부분이 가장 낮은 활성 정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감소된 공포 반응은 오래 지속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주일 후에 해당 부분의 뉴런 간 전기 신호를 측정했을 때 그 진동수와 진폭이 공포 반응이 제거된 직후와 같았고 심지어 아예 공포 반응을 학습시키지 않은 생쥐의 편도체의 반응과 다르지 않았다.
연구팀은 새롭게 발견한 신경회로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치료에 기여하기를 바라고 있다. 머지않아 이 연구가 임상 현장에서 다시 한 번 빛을 발하기를 기대한다.
글: 이보윤 과학칼럼니스트/일러스트: 유진성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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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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