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행주대첩의 숨은 공로자 - 화차와 신기전

<KISTI의 과학향기> 제404호   2006년 02월 08일
1593년 2월 12일 새벽 6시. 3만 명의 왜군이 행주산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행주산성을 지키던 조선군 병사는 고작 2,800명. 왜군은 첨단 무기인 조총으로 무장하고 있는데다가 행주산성은 성벽이 없는 토성이다. 객관적인 상황으로는 행주산성은 금방 함락될 수 밖에 없어 보인다. 그러나 전투는 열두 시간이나 계속되었고, 왜군은 아홉 번째 공격을 끝으로 퇴각하고 말았다. 왜군의 사상자는 자그마치 1만 명. 왜군은 회복하기 힘든 타격을 당했고, 육상 전투에서도 역전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역사는 이 전투를 행주대첩이라고 기록했다. 행주대첩의 승리의 원인은 무엇일까? 우리는 초등학교 때 ‘권율 장군의 뛰어난 지도력과 덧치마에 돌을 날라 투석전을 가능하게 했던 부녀자들의 애국심이 승리를 가져왔다. 돌을 나르는 데 사용한 행주치마 덕분에 이겨서 행주대첩이라고 부른다’고 배웠다.원래 초등학교 선생님에게 배운 내용은 의심하지 않고 또 쉽게 잊혀지지도 않는 법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의심해야 한다. 아낙네들이 행주치마로 돌을 날라 싸움을 지원했다는 것은 사실이겠지만, 돌멩이로 조총을 지닌 일본군 3만 명을 격퇴했다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권율 장군은 초등학교 담임선생님과는 다른 분석을 했다. “행주산성의 승리는 우리가 화차(火車)를 가지고 있었음이라.” 그렇다. 적은 인원으로 열 배도 넘는 적병을 물리쳤다는 것은 좋은 전술과 함께 뛰어난 무기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군의 화차는 왜군의 조총보다 더 뛰어난 무기였다. 조총의 사정거리가 50~100미터에 불과했던 데 비해, 화차는 조총과는 비교할 수 없는 최첨단 화약무기였던 것이다. 왜군을 물리친 화차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귀신 신(神), 틀 기(機), 화살 전(箭). 신기전(神機箭). 신기전은 세종 때부터 역사에 등장하여 활발히 사용된 화약무기로 1477년 편찬된 ?국조오례의 서례?의 ?병기도설(兵器圖說)?에 그 설계도가 전해지고 있는데 세계우주항공학회(IAF)는 이것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로켓 설계도로 공인한 바 있다. 신기전의 형태를 살펴보면, 약통(추진체)에는 화약(연료)을 넣어 끝을 종이로 여러 겹 접어 막고, 그 위에 발화통(폭탄)을 장착한다. 그리고 약통 윗면과 발화통 아랫면 가운데에 구멍을 뚫어 둘을 약선(도화선)으로 연결한다. 이렇게 연결한 까닭은 목표지점으로 신기전이 거의 다 날아갔을 때 폭탄인 발화통이 자동적으로 폭발하게 하기 위해서다.



신기전에는 대신기전, 중신기전, 소신기전 그리고 산화신기전이 있었다. 전체 길이 5.6미터, 약통 길이 70센티미터로 크기가 가장 큰 대신기전은 주로 압록강 하구의 의주성에서 압록강 건너편에 있는 오랑캐들을 공격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압록강 하구에서 물이 흐르는 너비를 감안하면 그 사정거리가 1.5~2킬로미터 정도일 것으로 추측된다. 가장 작은 소신기전은 맨 앞에 발화통 대신 화살촉을 달았으며 사정거리는 100~150미터였다.



신기전을 발사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화차다. 300개 이상의 부속품으로 이루어진 화차 위에 신기전기 혹은 총통기를 설치하고 100개의 신기전을 놓거나 사전총통 50개를 놓고 이것을 차례로 점화하여 발사하는 것이다. 특히 1개의 사전총통에는 4발의 세전을 장전할 수 있으므로 모두 200발의 세전을 연발로 발사할 수 있었다.

특이하게도 조선의 화차는 차체가 바퀴 축보다 반지름 이상 높은 곳에 있었는데 이것은 손잡이를 자유롭게 조종하여 신기전의 발사 각도를 다양하게 하여 사정거리를 조절하기 위한 것이다. 이 경우 손잡이를 바닥에 놓으면 발사각도가 43도가 되는데 이것은 이론적으로 최장발사각도에 가깝다.



왜군의 조총에 맞서 조선군은 모든 화약무기를 동원하였다. 개인발사용인 사전총통과 적군이 접근할 때 던지는 수류탄인 지화통뿐만 아니라 자그마치 40대의 화차가 동원되었다. 신기전은 소리와 모습뿐 아니라 폭발력도 컸기 때문에 왜군의 기세를 꺾는 선제공격용 무기로 충분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신기전의 구조는 당시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수준을 보여준다. 안정막대의 길이와 끝의 날개 그리고 약통의 위치는 신기전이 무게중심을 유지하여 안정된 포물선으로 비행하도록 정밀하게 제작되었다. 단위는 기술의 정밀도를 보여주는데 ?병기도설?에 사용된 1리(釐)는 0.3밀리미터다. 이것으로 당시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정밀도를 알 수 있다. 당시에 0.1mm단위까지 정밀하게 화약무기를 제조했던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조선 초기에 보여준 이러한 무기 기술은 세조 이후로 큰 발전을 이루지 못했다. 조선의 화포 기술을 비롯한 과학기술 자체가 침체기에 접어들었고 기술 개발의 의지도 거의 없었다. 혹자는 화차를 개발하고, 화약 제조술에 뛰어났던 문종의 재위 기간이 더욱 길었다면 우리나라 판도가 바뀌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기도 한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다지만 과학기술을 홀대하는 조선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달라졌을까? (글 : 이정모 -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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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직
  • 평점   별 5점

영화 신기전에 나온 내용이 맞군요. 세계최초의 로켓이라 멋진데요. 신기전에 나온 것처럼 종류도 여러가지 였군요. 그 기술들이 계속해서 다듬어졌다면 과학강국이 되었을텐데 아쉽네요.

2009-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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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란
  • 평점   별 5점

신기전을 주제로 한 영화도 만들어졌죠. 조선시대에 과학의 중요성을 좀더 일찍 깨달았다면 지금보다 더 발전된 한국의과학사가 존재하겠네요

2009-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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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원
  • 평점   별 5점

사실 일본만 역사왜곡을 하는것은 아니죠
다만 강도가 지나치고, 이웃나라라가 불쾌함을 넘어서 혐오감을 느끼게 한다는 차이점이 있을 뿐입니다.

사실 학교에서는 행주치마의 역활을 지나치게 강조하죠
실제로 성벽도 없는 토성에서
돌이 주무기였다면 사거리는 당연히 조총보다 짧을 것이고
권율장군은 10배나 되는 왜적들을 상대로 이길수 없었을 것입니다.
역사 왜곡이라고 하기는 강도가 약하지만
행주대첩의 빛나는 승리는 행주치마로 날라온 돌 덕분이라고 하기에는
모순이 있습니다.
행주치마의 의의가 큰 것은, 여성이 천대 받던 시절에
나라를 위하여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고 행주대첩의 승리에
기인했다는 이유일 것입니다.

그리고
100발을 발사할 수 있는 신기전이 40 개라면
모두 4000발을 발사하는 것인데
사정거리 또한 대신기전이 초총에 비해서 15 정도나 멀으니
그 위력을 짐작할만 합니다.

최고의 장거리 무기에 근거리 무기로는 수류탄 역활을 하는 지화통에
개인 발사무기인 사전 총통까지 동원한 화력 전이었으니...

2006-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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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원
  • 평점   별 5점

유럽에 총도 없었던 시절에
우리나라는 2km를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 터지는
세계 최고 수준의 무기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기술만 제대로 살렸더라면
어째서 임진왜란, 정묘호란으로 고생을 했었겠습니까?

2006-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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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일
  • 평점   별 5점

senator 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사진이 정말 아쉽군요. 어떻게 안되면 동영상이라도... ^^

2006-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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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nator
  • 평점   별 5점

좋은 글에 어울리는 그림(설명도, 사진, 설계도, 개념도 등)을 보여주면 이해하는데 더욱 도움이 될것같습니다.

2006-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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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균
  • 평점   별 5점

신기전을 볼때마다 기술발전이 중단된것을 아쉽게 느낌니다.그렇지만 가슴 뿌듯함은 자랑스럽군요..

2006-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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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 평점   별 5점

행주치마=행주대첩이 식민사관의 결과라는걸 오늘 알게되었습니다. 깨는군요. 이런거 종종 밝혀주세요~ 정말 유익하고 좋습니다. 왜인들의 역사 왜곡은 어디까지인건지... 왜 우리 어릴적엔 선생님도 왜곡된 역사만 가르쳐주신건지.. 왜곡인지도 몰랐겠죠. 마음이 아프네요.

2006-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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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도
  • 평점   별 5점

지금 사회도 그때를 따라가는 듯...
현재 과학을 멸시하는 풍조가 뿌리내린듯...

2006-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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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무
  • 평점   별 5점

정말이지 유럽처럼 과학기술을 서로 연구하고 널리 퍼뜨리는 관습이 있었더라면 솔직히 지금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떵떵거리는 강대국이 되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는 지배계층이 모두 숨기고 개발안하고 썩히고......정말 답답합니다
지금도 그러니 원..

2006-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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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호
  • 평점   별 5점

참으로 좋은 글입니다. 정말로 문종 임금이 세종 만큼만 살았다면....그리고 단종을 몰아낸 세조도 문제 였다고 생각됩니다. 세조가 들어서면서 옛날의 분위기가 갑자기 바뀌어 버렸다고 생각이 됩니다.

2006-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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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집기
  • 평점   별 5점

아냐. 조선시대 사람들이 과학기술을 우습게 봤다는건 일제식민사관이다. 조선시대때 그만큼 발달할수 있었던것은 기술을 우습게 보지 않았다는 증거다. 우리가 기술을 천시해서 발전에 뒤쳐져 일제가 도래했다는 것은 명백한 일제식민사관이다.

2006-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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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원
  • 평점   별 5점

좋은기사.

2006-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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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스승이다
  • 평점   별 5점

과학기술을 우습게 봤던 조선이 과학기술의 우수성을 알고 있었으면, 약 36년간의 일제 강점기 가 없었다. 아무래도......

2006-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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