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생명체 ‘기억이식’ 성공, 비밀의 문 열리나

<KISTI의 과학향기> 제3148호   2018년 05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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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의 저작권은 인터넷 과학신문 '사이언스타임즈'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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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상영되고 있는 영국 드라마 ‘블랙 미러(Black Mirror)’는 첨단 기술이 일상화된 사회 모습을 다루고 있다. 다양한 기술을 통해 갖가지 독특한 상황이 연출되는데, 사람 대상의 ‘기억을 조절할 수 있는 기술’이 등장한다.
기계로 과거의 기억을 돌려보면서 아주 세세한 것까지 읽어낼 수 있다. 공상 과학(SF) 속의 현실이라고 웃어넘길 수 있지만 비슷한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최근 과학자들이 (생명체의) 기억을 조절할 수 있는 기술 개발에 성공하고 있는 중이다.
16일 ‘뉴욕 타임즈’에 따르면 UCLA 과학자들이 잘 훈련된 달팽이 뇌세포에서 훈련받지 않은 달팽이 뇌세포로 분자를 이전하는데 성공했으며, 이에 따라 훈련을 받지 않은 달팽이가 잘 훈련된 달팽이의 경험을 공유할 수 있게 됐다고 보도했다.
 
기억과 관련된 RNA 기능 새로 발견해
 
연구 논문은 최근 국제 학술지 ‘이뉴로(eNeuro)’에 개재됐다. 논문 제목은 ‘RNA from Trained Aplysia Can Induce an Epigenetic Engram for Long-Term Sensitization in Untrained Aplysia’이다.
논문의 주 저자인 UCLA의 신경생리학자 데이비드 그랜츠맨(David Granzman) 교수는 그동안 바다 소라의 한 종인 ‘군소갯민숭달팽이(Aplysia californica)’를 연구해왔다. 13cm 크기의 이 달팽이는 수 년 동안 일어난 일을 기억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또한 신경세포(neuron)가 매우 커 기억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연구가 손쉬운 동물이다. 그랜츠맨 교수 연구팀은 실험을 통해 이 동물에 전기 자극을 주면 배설물을 방출하는 주름진 관(frilly siphons)을 재빨리 움츠린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러나 이전에 전기 자극을 경험한 군소갯민숭달팽이는 이런 경험을 하지 못한 달팽이보다 훨씬 더 오래 그 관을 움츠렸다.
최근 들어서는 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특정한 기억을 지니고 있는 세포를 제거했을 때에도 일부 흔적이 계속 남아 있었다.
이는 기억을 저장할 수 있는 RNA 없이도 오랫동안 과거 경험을 기억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연구팀은 의문을 품고 그 원인을 추적해나갔다. 그리고 일부 RNA에 유전자(genes) 기능을 켰다 껐다 하는 기능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했다.
유전물질인 DNA에 있는 화학적 표지(chemical tags)가 있어 RNA가 이를 자극할 경우 그 기능이 지속되고 오랜 기억을 남기게 된다는 것. 연구팀은 군소갯민숭달팽이뿐만 아니라 쥐와 같은 실험용 동물에게서도 같은 결과가 나왔다고 설명했다.
연구팀은 군소갯민숭달팽이 뇌세포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내기 위해 전기 자극 경험을 한 달팽이와 그렇지 않은 달팽이 뇌세포를 모두 배양했다. 그리고 전기 자극 훈련이 이루어진 달팽이 뇌세포로부터 RNA를 추출했다.
 
사람도 기억 전달할 수 있을지 관심
 
그리고 이 RNA를 전기 자극 경험이 없는 달팽이 뇌세포에 주입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새로운 RNA를 주입받은 달팽이들이 전기 자극을 받은 것처럼 오랫동안 배설물을 방출하는 주름진 관(frilly siphons)을 움츠렸다.
이를 통해 전기 자극을 경험한 달팽이의 기억이 그렇지 않은 달팽이의 기억 속으로 이전됐음을 알 수 있었다.
연구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다른 실험도 진행했다. 약물을 사용해 전기 자극 경험이 없는 달팽이에 화학적 표지를 제거했다. 그리고 전기 자극 경험이 있는 달팽이로부터 추출한 RNA를 주입한 결과 전기 자극에 대한 기억이 전혀 전달되지 않았다.
이는 DNA에 있는 화학적 표지가 군소갯민숭달팽이뿐만 아니라 일반 설치류 기억력에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번 연구는 1960년대 있었던 편형동물(flatworms, 扁形動物) 연구에 후속 작업이다. 좌우대칭이고 무체강이며 배복이 편평하고 체절은 없으며 맹낭의 장관에 항문공이 없는 유충형 동물을 말한다. 충류, 단생류, 흡충류, 촌충류의 4강으로 구성돼 있다.
당시 과학자들은 서로를 잡아먹는 이 사납고 잔인한 동물에 열광하고 있었다. 이 조그만 동물에 빛을 비추고 어떻게 반응하는지 실험을 진행했다. 그리고 이 빛 자극 경험을 한 동물의 잔해를 다른 편형동물들에게 먹였다.
그리고 죽은 편형동물의 기억이 그렇지 않은 다른 편형동물에게 전달되는지 관찰한 결과 신기하게도 그 기억 전달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이 과학적으로 증명되고 위해서는 같은 실험 결과가 반복돼야 했다.
당시 기술로는 그것이 불가능했다. 그리고 거의 50년이 지난 지금 UCLA 과학자들에 의해 군소갯민숭달팽이의 기억이 전달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랜츠맨 교수는 “이번 연구가 오래 전 편형동물 연구 이후 진행된 첫 번째 연구”라고 말했다.
교수는 또 “군소갯민숭달팽이뿐만 아니라 다른 동물들로 연구를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그래서 뇌 기능에 있어 RNA와 DNA 화학적 표지 간에 어떤 관계가 형성되고 있으며, 또한 기억력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더 구체적인 사실을 밝혀내고 싶다.”고 말했다.
과학계는 다양한 동물 실험을 통해 그동안 의문에 쌓여 있던 기억 메커니즘이 규명될 것으로 보고 있다. 연구 결과가 축적됨에 따라 사람의 기억 형성 및 전달 과정을 규명하는데도 큰 도움을 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최근 뇌과학이 발전하면서 그동안 미지의 세계로 여겨져 왔던 기억 메커니즘이 하나둘 밝혀지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연구는 1회성 단기적 기억에 집중돼 왔다. 이번 연구 결과로 오랜 기억에 대한 비밀의 문이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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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타임즈 이강봉 객원기자
저작권자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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