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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을 받지 못한 과학자들
<KISTI의 과학향기> 제371호 2005년 11월 23일
지금은 6개 부문에서 시상하는 노벨상은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으로 꼽히며 이중 과학 분야는 노벨 물리학상, 노벨 화학상, 노벨 생리의학상이 있다. 따라서 각 분야의 당대 최고 과학자들은 당연히 노벨 과학상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일반 대중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저명한 과학자나, 과학기술의 발전에 획기적인 업적을 이룩한 인물 중에서도 노벨 과학상을 받지 못한 이들이 의외로 적지 않다.
뛰어난 과학자들이 노벨 과학상을 받지 못한 이유로 ‘노벨상은 생전의 인물, 즉 당시에 살아있는 사람만 받을 수 있고 사후에는 수여하지 않는다’는 규정을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다. 이것은 처음 노벨상 제도가 만들어질 무렵에 갈릴레이(Galileo Galilei), 뉴턴(Isaac Newton), 패러데이(Michael Faraday) 등 이미 고인이 된 대가들이 계속 노벨 과학상을 ‘싹쓸이’함으로써 당대의 과학자들에게는 차례가 가지 않을지도 모르는 폐단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고인이 수상한 경우로는, 노벨상 수상자로 결정된 직후 시상식 이전에 사망한, 단 한 번의 예외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규정으로 인하여 일찌감치 큰 업적을 내고도 노벨상을 받지 못한 경우가 종종 있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X선 산란에 관한 연구로 ‘모즐리의 법칙’을 발견하고 원자번호와 원자핵의 전하량 사이의 관계를 밝혀서 노벨상 수상이 거의 확실시되었던 영국의 과학자 모즐리(Henry Moseley; 18873~1915)이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연합군이 수많은 사상자를 냈던 1915년의 갈리폴리 상륙작전에서 결국 27세의 아까운 나이로 전사하고 말았다.
그의 참전을 간곡히 만류했던 스승 러더포드(Ernest Rutherford)는 영국의회에 편지를 보내서 아까운 과학 인재들이 전쟁터에 나가 싸우는 것보다는 대학이나 연구소 등지에서 과학 연구를 계속하는 것이 나라에 더욱 큰 보탬이 된다는 것을 호소하였다. 이를 영국의회가 받아들였고 다른 여러 나라들에도 퍼졌는데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도 시행되고 있는 이공계 대체복무제도의 기원이라고 한다.
공헌을 인정받기 전에 사망하는 바람에 노벨상을 받지 못한 다른 사례로는 나일론의 발명자로서, 소속사인 뒤퐁(Du Pont)이 제품을 공개하기 전에 자살로 삶을 마쳤던 캐러더즈(Wallace Hume Carothers; 1896-1937), 그리고 X선 회절사진으로 DNA의 이중나선구조를 밝히는데 결정적 공헌을 한 여성과학자 로절린드 프랭클린(Rosalind Elste Franklin; 1920-1958) 등을 들 수 있다.
프랭클린은 왓슨(James Watson), 크릭(Francis Crick), 윌킨스(Maurice Wilkins) 등이 DNA 이중나선구조를 발견한 업적으로 1962년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기 4년 전인 1958년 4월, 37세의 나이에 암으로 삶을 마감하였다. 하지만, 설령 그가 그때까지 살아 있었다고 해도 3인까지만 공동수상이 허용되는 노벨상 수상 규정과 여성을 차별하는 풍토 때문에 노벨상 수상자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노벨 과학상이 여성을 차별하거나 인종적, 정치적 편견 등으로 인하여 수상자 선정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여러 차례 제기된 바 있는데, 리제 마이트너(Lise Meitner; 1878-1968)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여성과학자로서 퀴리 부인, 즉 마리 퀴리(Marie Curie)처럼 두 차례나 노벨 과학상을 받은 이도 있지만, 리제 마이트너는 오토 한(Otto Hahn), 프리츠 슈트라스만(Fritz Strassman)과 함께 핵분열의 원리 및 우라늄 연쇄반응의 메커니즘을 밝혀내는 탁월한 업적을 이루고도 끝내 노벨상을 받지 못했다. 반면에 공동 연구자였던 오토 한은 1944년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리제 마이트너는 훗날 미국 원자력 위원회에서 주는 ‘엔리코 페르미상’을 오토 한, 슈트라스만과 함께 공동수상했고, 새로 발견된 109번째 원소의 이름이 그녀를 기념하여 마이트네리움(Meitnerium)이라고 명명됐는데 이것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빠른 속도로 회전하는 중성자별인 펄서를 발견하고 전파천문학을 발전시킨 공로로 1974년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영국의 천체물리학자 안토니 휴이시(Antony Hewish; 1924~) 교수의 경우 역시 그의 지도 학생으로서 펄서를 처음 발견했던 여성 과학자 조셀린 벨을 수상에서 제외해 여성 차별이라는 논란이 거세게 일어난 바 있다.
노벨상 수상자 선정위원회의 성향이 수상자 선정에 큰 영향을 끼쳐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인데, 물리학 같은 분야를 보더라도 이론물리학자보다는 실험물리학자들에게 더 유리하다는 것이 통설이다. 이와 관련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이후 최고의 이론물리학자로 꼽히는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 박사가 왜 아직도 노벨상을 받지 못했느냐는 의문이 종종 제기된다. 물론 호킹은 ‘휠체어 위의 물리학자’로 널리 알려진 대중적 명성에 비해 그의 업적에 대해서는 견해를 달리할 수도 있겠지만, 아인슈타인 조차도 그 유명한 상대성이론은 끝내 인정받지 못하고 광량자 가설로 가까스로 노벨상 수상자 대열에 합류했을 정도이다. 양자역학의 단초를 제공한 막스 플랑크(Max Planck)도 오랫동안 ‘만년 후보’로 있다가 아주 뒤늦게야 노벨상 수상자가 될 수 있었다.
“노벨 수학상은 왜 없는가?” 하는 것은 해묵은 논쟁거리이지만, 실용기술이나 공학 분야의 공로자에게 줄만한 마땅한 분야도 없어서 발명왕 에디슨(Thomas Edison), 컴퓨터의 아버지 폰 노이만(John von Neumann) 등도 노벨상을 받지는 못했다. 무선전신의 발명자 마르코니(Guglielmo Marconi), 집적회로(IC)의 창시자 킬비(Jack Kilby) 정도가 공학적인 발명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예외적인 경우에 속한다. 천문학, 지구과학이나 다른 과학 분야 등도 차별 대우를 받는 것은 마찬가지여서, 우주팽창론을 제시한 저명한 천문학자 허블(Edwin Hubble), 사이버네틱스의 창시자 위너(Norbert Wiener) 등도 수상자 대열에서 제외되었다.
또한 오늘날의 과학 연구는 수많은 과학자들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거대 과학’이 보편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과학 분야 노벨상은 단체에게 수여되지 않고 최대 3인까지의 개인 수상만 고수되어 온 점은 계속 논란이 되고 있다. 노벨과학상 수상 자체에만 지나치게 집착하는 태도는 물론 바람직하지 못하겠지만, 노벨상이 지니는 권위와 그 영향력을 감안한다면 노벨과학상 제도 역시 시대적 조류에 맞추어 개편되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글 : 최성우 - 한국과학기술인연합 운영위원)
뛰어난 과학자들이 노벨 과학상을 받지 못한 이유로 ‘노벨상은 생전의 인물, 즉 당시에 살아있는 사람만 받을 수 있고 사후에는 수여하지 않는다’는 규정을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다. 이것은 처음 노벨상 제도가 만들어질 무렵에 갈릴레이(Galileo Galilei), 뉴턴(Isaac Newton), 패러데이(Michael Faraday) 등 이미 고인이 된 대가들이 계속 노벨 과학상을 ‘싹쓸이’함으로써 당대의 과학자들에게는 차례가 가지 않을지도 모르는 폐단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고인이 수상한 경우로는, 노벨상 수상자로 결정된 직후 시상식 이전에 사망한, 단 한 번의 예외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규정으로 인하여 일찌감치 큰 업적을 내고도 노벨상을 받지 못한 경우가 종종 있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X선 산란에 관한 연구로 ‘모즐리의 법칙’을 발견하고 원자번호와 원자핵의 전하량 사이의 관계를 밝혀서 노벨상 수상이 거의 확실시되었던 영국의 과학자 모즐리(Henry Moseley; 18873~1915)이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연합군이 수많은 사상자를 냈던 1915년의 갈리폴리 상륙작전에서 결국 27세의 아까운 나이로 전사하고 말았다.
그의 참전을 간곡히 만류했던 스승 러더포드(Ernest Rutherford)는 영국의회에 편지를 보내서 아까운 과학 인재들이 전쟁터에 나가 싸우는 것보다는 대학이나 연구소 등지에서 과학 연구를 계속하는 것이 나라에 더욱 큰 보탬이 된다는 것을 호소하였다. 이를 영국의회가 받아들였고 다른 여러 나라들에도 퍼졌는데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도 시행되고 있는 이공계 대체복무제도의 기원이라고 한다.
공헌을 인정받기 전에 사망하는 바람에 노벨상을 받지 못한 다른 사례로는 나일론의 발명자로서, 소속사인 뒤퐁(Du Pont)이 제품을 공개하기 전에 자살로 삶을 마쳤던 캐러더즈(Wallace Hume Carothers; 1896-1937), 그리고 X선 회절사진으로 DNA의 이중나선구조를 밝히는데 결정적 공헌을 한 여성과학자 로절린드 프랭클린(Rosalind Elste Franklin; 1920-1958) 등을 들 수 있다.
프랭클린은 왓슨(James Watson), 크릭(Francis Crick), 윌킨스(Maurice Wilkins) 등이 DNA 이중나선구조를 발견한 업적으로 1962년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기 4년 전인 1958년 4월, 37세의 나이에 암으로 삶을 마감하였다. 하지만, 설령 그가 그때까지 살아 있었다고 해도 3인까지만 공동수상이 허용되는 노벨상 수상 규정과 여성을 차별하는 풍토 때문에 노벨상 수상자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노벨 과학상이 여성을 차별하거나 인종적, 정치적 편견 등으로 인하여 수상자 선정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여러 차례 제기된 바 있는데, 리제 마이트너(Lise Meitner; 1878-1968)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여성과학자로서 퀴리 부인, 즉 마리 퀴리(Marie Curie)처럼 두 차례나 노벨 과학상을 받은 이도 있지만, 리제 마이트너는 오토 한(Otto Hahn), 프리츠 슈트라스만(Fritz Strassman)과 함께 핵분열의 원리 및 우라늄 연쇄반응의 메커니즘을 밝혀내는 탁월한 업적을 이루고도 끝내 노벨상을 받지 못했다. 반면에 공동 연구자였던 오토 한은 1944년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리제 마이트너는 훗날 미국 원자력 위원회에서 주는 ‘엔리코 페르미상’을 오토 한, 슈트라스만과 함께 공동수상했고, 새로 발견된 109번째 원소의 이름이 그녀를 기념하여 마이트네리움(Meitnerium)이라고 명명됐는데 이것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빠른 속도로 회전하는 중성자별인 펄서를 발견하고 전파천문학을 발전시킨 공로로 1974년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영국의 천체물리학자 안토니 휴이시(Antony Hewish; 1924~) 교수의 경우 역시 그의 지도 학생으로서 펄서를 처음 발견했던 여성 과학자 조셀린 벨을 수상에서 제외해 여성 차별이라는 논란이 거세게 일어난 바 있다.
노벨상 수상자 선정위원회의 성향이 수상자 선정에 큰 영향을 끼쳐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인데, 물리학 같은 분야를 보더라도 이론물리학자보다는 실험물리학자들에게 더 유리하다는 것이 통설이다. 이와 관련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이후 최고의 이론물리학자로 꼽히는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 박사가 왜 아직도 노벨상을 받지 못했느냐는 의문이 종종 제기된다. 물론 호킹은 ‘휠체어 위의 물리학자’로 널리 알려진 대중적 명성에 비해 그의 업적에 대해서는 견해를 달리할 수도 있겠지만, 아인슈타인 조차도 그 유명한 상대성이론은 끝내 인정받지 못하고 광량자 가설로 가까스로 노벨상 수상자 대열에 합류했을 정도이다. 양자역학의 단초를 제공한 막스 플랑크(Max Planck)도 오랫동안 ‘만년 후보’로 있다가 아주 뒤늦게야 노벨상 수상자가 될 수 있었다.
“노벨 수학상은 왜 없는가?” 하는 것은 해묵은 논쟁거리이지만, 실용기술이나 공학 분야의 공로자에게 줄만한 마땅한 분야도 없어서 발명왕 에디슨(Thomas Edison), 컴퓨터의 아버지 폰 노이만(John von Neumann) 등도 노벨상을 받지는 못했다. 무선전신의 발명자 마르코니(Guglielmo Marconi), 집적회로(IC)의 창시자 킬비(Jack Kilby) 정도가 공학적인 발명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예외적인 경우에 속한다. 천문학, 지구과학이나 다른 과학 분야 등도 차별 대우를 받는 것은 마찬가지여서, 우주팽창론을 제시한 저명한 천문학자 허블(Edwin Hubble), 사이버네틱스의 창시자 위너(Norbert Wiener) 등도 수상자 대열에서 제외되었다.
또한 오늘날의 과학 연구는 수많은 과학자들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거대 과학’이 보편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과학 분야 노벨상은 단체에게 수여되지 않고 최대 3인까지의 개인 수상만 고수되어 온 점은 계속 논란이 되고 있다. 노벨과학상 수상 자체에만 지나치게 집착하는 태도는 물론 바람직하지 못하겠지만, 노벨상이 지니는 권위와 그 영향력을 감안한다면 노벨과학상 제도 역시 시대적 조류에 맞추어 개편되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글 : 최성우 - 한국과학기술인연합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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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대에 발 맞추어 노벨상의 규정도 바꾸어야겠네요..
2009-04-07
답글 0
노벨상을 못 받은 사람중에서...
러시아 사람 한 명이 생각나는데..(이름이 생각이 안 나네요. ^^;)
중력장 방정식을 계산해서 최초로 블랙홀 이론을 발표한 사람이었는데.... 전쟁터에서 죽었었죠...
2005-12-04
답글 0
비슷한 시기에 같은 분야에서 활동한 코흐와 파스퇴르의 노벨상 수상 여부 역시 제가 본문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이유에 의한 것이었습니다.(생존자에게만 수상...) 그래도 파스퇴르가 코호보다 20여년 더 연배가 위인데, 코흐는 1905년도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고 1910년에 사망하였습니다. 그러나 파스퇴르는 1895년에 사망하였는데, 그때는 노벨상이라는 제도가 생기지 이전이었지요. 1901년부터 제 1회 노벨상이 시작되었으니까요...
삽화에도 표현되었듯이, 큰 업적을 이룬 다음에 '오래 사는 것'이 노벨상 수상의 큰 관건의 하나입니다. 올해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글라우버 교수도 80세이더군요...
2005-11-24
답글 0
노벨상이 잘못 수상된 경우로는 "기생충이 암의 원인"이라는 주장으로 1926년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덴마크의 병리학자 요하네스 피비거를 들 수 있습니다. 나중에 실험의 해석을 잘못한 것이 밝혀졌지만, 수상자는 이미 사망한 이후였지요...^^
2005-11-24
답글 0
로버트 코흐와 동시대 대학자로서 코흐는 노벨상을 받았는데,파스퇴르는 왜 받지 못했나요?
2005-11-24
답글 0
리제 마이트너의 경우는 물론 그녀가 유태인이었기 때문에 여성 차별에 겹쳐서 나찌 독일의 박해를 받은 것도 업적을 인정받지 못한 이유의 하나가 됩니다.
제가 다른 곳에 쓴 글에서는 이 부분을 언급하였습니다만...
http://www.scieng.net/zero/view.php?id=science&page=2&category=&sn=on&ss=on&sc=on&keyword=최성우&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596
또한 제가 예전에 과학향기의 다른 글에서 이미 '역사 속의 여성과학자'를 논한 적이 있으므로 리제 마이트너만 또 길게 언급하기 어려운 면도 있었습니다.
다만 한가지 잘못 알고 계신 것이 있는데... 프리츠 슈트라스만도 노벨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 등은 위의 제 링크 글에 함께 나와 있습니다.
2005-11-24
답글 0
흥미로운 주제군요.. 잘 봤습니다.
참고로 노벨상이 잘못 수여되어 박탈되지 못한 경우도 있죠.
2005-11-23
답글 0
재미있는 글입니다. 한가지 리제 마이트너의 경우, 그녀가 유태인 여성학자로 독일에서 연구를 하면서 핵분열의 원리를 발견하는데 기여했지만 나치정권의 유태인탄압으로 인해 독일을 떠나야 했고 그 이후 그녀의 업적은 나치정권에 의해 삭제되면서 노벨상에서 한과 슈트라스만이 수상하게 됩니다. 이 사실을 첨가했으면 더 흥미로운 글이 되었을텐데...
2005-11-23
답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