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고운 피부를 위해선 부럼을 깨무세요

<KISTI의 과학향기> 제89호   2004년 02월 04일
우리 속담에 ‘설날은 밖에서 쇠도, 보름은 집에서 쇠라’는 말이 있다. 대보름은 설날부터 시작된 흥겨운 분위기를 단도리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본격적인 한 해를 시작하는 분기점이기에 중요한 날이었다. 대보름이 되면 사람들은 마을마다 제사를 지내거나 줄다리기, 지신밟기, 쥐불놀이, 달집태우기, 다리밟기, 고싸움, 복토(福土) 훔치기 등 흥겨운 놀이와 함께 천지신명께 복을 빌었다. 또한 대보름 음식으로 하루 전날인 열 나흗날 저녁에 찹쌀, 조(기장), 팥, 수수, 검은콩을 넣은 오곡밥을 지어 취나물이나 김에 싸서 먹고, 당일 날 아침에는 귀를 밝게 한다는 술 한 잔에 부럼을 깨문 뒤 한해 더위를 팔러 나가곤 했다.이중 가장 흥미로운 것이 바로 부럼을 깨무는 것이다. 부럼이란 대보름날 아침에 잣, 밤, 호두, 땅콩, 은행 따위의 견과류를 한 번에 깨무는 풍습인데, 이는 부스럼을 예방한다고 믿어졌기에 옛 사람들은 저마다 이를 간절히 비는 마음으로 부럼을 깨물곤 했다.



부스럼이란 종기를 의미하는 말로, 의학적으로는 화농구균, 주로 황색 포도상 구균이라 불리는 세균에 의해 생기는 급성 화농성 염증을 의미한다. 부스럼은 몸에서 털이 난 곳이라면 어디든지 생길 수 있는데, 피부의 상처를 통해 이런 세균들이 감염되면 그 부위가 단단해지고 벌겋게 부어오르기 시작한다. 더 심해지면 감염 부위에 고름이 가득 차게 되고 열이 나 손도 못 댈 만큼 아프게 변한다.



지금이야 상처가 부스럼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거의 없지만, 과거에는 영양이 부족할 뿐더러 개인위생도 좋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또한 변변한 치료조차 제대로 받을 수 없어 상처가 나면 대부분 부스럼으로 진행됐다. 조선왕조실록만 봐도 천하의 지존이라 할 수 있는 왕이 부스럼으로 고생했다는 이야기가 종종 나온다. 세조가 부스럼으로 잠을 못 이룰 정도였다거나, 예종의 등에 난 부스럼을 제대로 치료하지 않은 죄로 어의가 처벌을 받았다는 이야기들은 부스럼이 그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흔하고 괴로운 존재였음을 알 수 있다.



사정이 이러하니 한 해를 시작하고 부스럼이 나지 않기를 간절히 기원한 것이 과연 수긍이 갈만하다. 하지만 견과류를 깨무는 것이 과연 부스럼 예방에 좋았을까.



흥미로운 것은 부럼풍습이 과학적으로도 피부질환 예방에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부럼으로 사용되는 견과류에는 불포화 지방산과 각종 비타민(비타민B1과 E, 나이아신, 엽산 등)과 무기질(철, 망간, 마그네슘, 구리, 셀레늄)이 풍부한데, 이들이 모두 피부에 좋은 요소들이기 때문이다.



불포화 지방산은 피부가 거칠어지는 것을 막아주며 혈액 중에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춰 혈액 순환을 돕는다. 비타민 B1은 피지 분비를 조절해 피부를 보호하는 효과가 있어 이것이 부족하면 마른버짐이 생기며, 토코페롤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비타민 E는 피부의 노화를 방지하고 피부가 트는 현상을 막는다. 엽산은 피부나 점막을 건강하게 하고, 마그네슘의 경우 피부에 수분 보호막을 생성시켜 피부를 보호한다. 최근 우유광고에 나와 관심을 받고 있는 셀레늄의 경우 피부 질환 치료에 효과적인 성분이다.



결국 부럼을 깨무는 풍습은 겨우내 추위와 건조함에 시달린 피부에 생기를 주고, 부스럼에 대항할 수 있도록 피부를 튼튼히 하는, 단순한 바람이상의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내일이면 바로 대보름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깨무는 부럼 한 조각에서 한 해 건강을 기원하며 피부에 윤기를 더해보는 것은 어떨까.

(글: 이은희/ 과학칼럼니스트, ‘과학 읽어주는 여자’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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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란
  • 평점   별 5점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옛날에도 선조들이 지혜를 발휘했다는것이 놀랍습니다. 내년에는 보름이 되면 꼭 부럼을 깨물어야겠네요.

2009-04-06

답글 0

이지민
  • 평점   별 5점

항상 좋은 기사 감사드립니다. ^^

2009-04-01

답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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