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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를 읽는 기술, 마비된 신체를 움직이다
<KISTI의 과학향기> 제2795호 2016년 12월 05일‘뇌 과학’을 공부하고 있는 대학원생 박 모양(25)은 학교 앞에 있는 커피전문점의 ‘사이렌오더’ 서비스를 자주 애용한다. 학교에 도착하기 5분 전쯤 스마트폰에 깔린 사이렌오더 서비스 앱으로 커피를 구매하면 점원에게 주문하고 대기하는 과정을 건너뛸 수 있어서 시간을 아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역시 사이렌오더 서비스로 주문한 커피를 손에 들고 캠퍼스로 들어가던 박 양은 문득 현재 참여하고 있는 ‘하지마비 환자를 위한 보행 프로젝트’에 이 같은 서비스를 적용해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했다.
전통적인 커피 구매 방식인 ‘주문→점원→커피’에서 점원의 역할을 최소화 시킨 것이 사이렌오더 서비스인 것처럼 ‘뇌 전기 신호→척수→다리 근육’으로 이어지는 보행 과정에서 척수로 전해지는 단계를 건너뛰는 방법을 떠올려 본 것.
박 양이 지도교수에게 자신의 아이디어를 설명하자, 교수는 “이미 늦은 것 같다”라고 허탈하게 웃으며 앞에 놓인 신문을 건네주었다. 박 양이 집어든 신문에는 ‘하반신 마비 원숭이, 와이파이로 다시 걷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다.
■ 뇌와 다리 근육을 잇는 와이파이 시스템이 핵심
척수가 손상돼 하반신이 마비된 원숭이를 다시 걸을 수 있게 만든 주인공은 스위스 취리히공과대학의 연구진이다. 이들은 ‘무선 송수신(Wi-Fi)을 통해 뇌의 전기신호를 직접 다리근육으로 보내는 방법을 사용하여 원숭이를 걷도록 만드는데 성공했다.
빛나는 성과를 거뒀지만 연구진을 이끌고 있는 취리히공과대의 그레고르 쿠르틴(Grégoire Courtine) 교수는 10여 년이라는 오랜 시간을 스위스와 중국을 오가며 수많은 임상실험을 진행한 끝에 이 같은 결과를 확보할 수 있었다. 중국을 임상장소로 선택한 이유는 실험과 관련된 규제에 대해서 비교적 관대한 편이기 때문이다.
쿠르틴 교수는 이번 연구결과의 의의에 대해 “뇌의 이상에 따른 질병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불치병으로 알려져 있는 중풍을 치료할 수 있는 길을 처음으로 열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이번 연구성과의 핵심은 원숭이의 뇌와 아래쪽 척수에 각각 전극을 이식해 두 전극을 연결하는 Wi-Fi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을 통해 척수가 손상돼 있어도 뇌에 이식된 전극이 전기신호를 보내 다리를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쿠르틴 교수는 “다시 걷기 시작한 원숭이의 상태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완벽하지는 않지만 건강한 원숭이와 거의 같은 걸음을 걷고 있다”라고 밝히며 “특히 운동을 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기능이라 할 수 있는 다리가 몸무게 전체를 튼튼히 지지하고 있는 상태는 상당히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덧붙였다.
이 같은 성과에 대해 현재 전 세계의 신경과학계는 흥분에 휩싸여 있는 상황이다. 일반적으로 손이나 손가락을 움직이게 만드는 뇌 신호보다 발과 다리에 적용되는 반응 과정이 더 복잡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학계의 관계자는 “이번 연구결과는 임상연구의 새 길을 연 위대한 성과”라고 평가하며 “특히 의미가 있는 것은 사지 마비 환자들에게 생체전자공학치료(bioelectronic treatment)라는 새로운 옵션을 제공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이라고 덧붙였다
■ 뇌를 읽는 기술 중에서도 뇌 임플란트가 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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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뇌와 다리 근육을 잇는 와이파이 시스템 개요,(ⓒN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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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마비 원숭이의 사례에서 보듯 사람을 포함한 동물이 움직이는 데는 뇌 속의 전기신호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뇌에서 보내는 전기신호가 척수를 타고 온 몸 전체로 퍼지면서 신경을 자극하여 근육이 동작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과학자들은 오래 전부터 뇌 속에서 발생하는 생체 전기신호를 컴퓨터로 해석하는 ‘뇌·컴퓨터 연결(BCI, Brain Computer Interface)’ 기술을 연구해 왔다.
뇌와 컴퓨터를 연결하는 기술은 그 종류가 다양하다. 기능성자기공명영상(fMRI) 장치로 촬영하는 방법과 뇌파측정(EEG) 장치를 이용하는 방법, 그리고 두개골 속으로 들어가는 근적외선을 이용해 뇌 혈류를 읽어내는 방법 등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뇌 임플란트(brain implant)’ 기술이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꼽힌다.
뇌 임플란트란 뇌에 전극을 연결하여 생체전기를 직접 읽어내는 기술로서, 뇌를 읽는 기술 중에서는 최근 들어 가장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스위스 취리히공대 연구진이 이번 연구에서 활용한 기술도 일종의 뇌 임플란트 기술이라 할 수 있다.
뇌 임플란트 기술과 관련된 대표적 사례로는 네덜란드의 여성인 하네케 드 브루너(Hanneke de Bruijne)를 꼽을 수 있다. 근위축성측삭경화증(ALS)으로 몸을 전혀 움직일 수 없던 그녀는 최근 뇌 임플란트 수술을 받은 후 최소한의 의사소통 능력을 되찾아 화제를 모았다. 일명 ‘루게릭병’으로 널리 알려진 이 ALS는 발병 직후부터 운동세포가 파괴되면서 결국 호흡과 관련된 근육까지 마비돼 죽음에 이르는 병으로 알려져 있다.
부루너가 되찾은 의사소통 방법은 뇌에 이식된 임플란트에 연결된 태블릿PC로 단어를 선택해 문장을 완성하는 것이다. 그녀는 이 방법을 통해 1분에 두 글자를 표시하면서 병세가 악화되기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자신의 의사를 가족들에게 전하는 감격을 맛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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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뇌 임플란트로 전달된 움직임이 모니터로 표시되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 연구진과 부루너.(ⓒUniversity Utrec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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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의 피츠버그대에서도 뇌 임플란트와 관련한 또 다른 임상실험이 진행되고 있었다. 대상자는 10년 전 교통사고를 당한 네이선 코프랜드(Nathan Copeland)라는 남성이었다. 그는 사고 후 손과 손가락의 모든 감각을 잃어버린 채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피츠버그대 연구진이 코프랜드의 뇌와 로봇팔을 전선으로 연결한 뒤 손가락을 하나하나 누르자 눈을 가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눌린 손가락을 정확히 알아맞혔다. 뇌 임플란트로 촉각을 느끼도록 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처럼 뇌 임플란트와 관련된 사례를 읽다보니 갑자기 흑묘백묘(黑猫白猫)라는 사자성어가 떠오른다. 검은 고양이든 하얀 고양이든 쥐를 잘 잡는 고양이가 최고인 것처럼,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움직이게 만들고 일으켜 세우는 기술이라면 어떤 분야든지 상관없다는 의미다.
최근 들어 줄기세포 같은 바이오 기술을 활용해 장애를 고치려는 시도가 늘고 있지만, 이는 보다 근본적인 방법이어서 시간도 오래 걸리고 투자규모도 막대하다. 이러한 때 뇌 임플란트 같은 전자공학이나 외골격 보조기 같은 재활공학이 도와준다면 장애인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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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내용입니다!
2016-12-06
답글 0
지식에도, 마음에도 도움이 되는 최신 정보 잘 보고 갑니다.
2016-12-05
답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