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관성으로 움직인다! 자벌레 만들기

<KISTI의 과학향기> 제1437호   2011년 09월 19일
청량한 숲 향기를 깊이 들이마신 나무꾼은 들이마신 숨 이상으로 깊은 한숨을 뱉어냈습니다. 근심이 있어서는 아닙니다. 근심이 없는 것 또한 아니지만, 지금의 한숨은 안도에 가까웠습니다.

“갔다. 나오거라.”

한참 부스럭대는 소리가 나더니 나무가 가득 쌓인 등짐에서 나무 같은 뿔 두 개가 뾰족하게 솟았습니다. 오른쪽으로 뾰족, 왼쪽으로 뾰족 느릿느릿 한 바퀴 돌더니 등짐 앞쪽으로 조심스레 나옵니다. 뿔이 공중을 떠다닐 리는 없으니 그 밑에는 필경 짐승 하나가 있을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아직도 겁에 질린 듯 눈물을 글썽글썽 매단 호수 같은 눈망울도 둘이 솟습니다. 갈색 반점이 사랑스러운 사슴입니다.

“감사하옵니다. 은인 덕분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가 뭘 했다고 그러느냐. 너같이 아담한 짐승 한 마리 숨겨주는 것 정도야 별 일도 아니란다.”

길게 뺀 목을 연신 조아리며 감사의 예를 올리는 사슴 앞에서 나무꾼은 그저 무뚝뚝하게 답할 뿐이었습니다. 사슴이 싫어서는 아닙니다. 성격이 고지식하고 답답해서 그렇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눈치 챈 일이기에 사슴도 과히 싫은 눈치를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은인께 아무 것도 아닌 일이라 해도 생명을 건져주신 은혜는 은혜. 한낮 미물인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미천하오나, 그래도 능력을 한껏 발휘해 그 은혜를 갚게 해주시면 감사하겠나이다.”
“그런 거창한 일은 아니라 했지 않았느냐.”
“제가 마음이 불편하옵니다. 부디 청을 들어주시옵소서.”

사슴의 고개가 거의 땅에 닿을 듯 굽혀집니다. 연신 손사래를 치는 몸이나 거절을 표하는 입과는 대조적으로, 나무꾼의 귀는 저도 모르게 쫑긋 서 있습니다. 이 작은 것이 얼마나 거창한 일을 해주려나. 어쩐지 저 숲속 너머에서 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같습니다. 사슴도 눈치 못 챈 바는 아니지만 자못 시치미를 떼며 얌전하게 고개를 들었습니다. 인간의 마음이란 건 어디에서나 같은 법이니까요.

“저 같은 미물의 힘으로도 충분히 준비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선물을 드리려고 하니 그리 염려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작은…, 흠흠. 알았다. 내 얼마든지 기다릴 테니 천천히 하거라.”

‘미물이 준비할 수 있는 작은 선물’이 대체 뭘까요. 나무꾼은 즐거운 상상의 나래를 펼쳤습니다. 표정은 무뚝뚝한 그대로지만 입꼬리가 자꾸 올라가는 것만은 멈출 수 없습니다. 뒤돌아서 부스럭대는 사슴에게는 보이려야 보일 수 없는 광경입니다만.

돌아선 사슴의 주둥이는 은색의 물체가 물려 있었습니다. 크기는 손바닥에 쏙 들어올 정도일까요. 기대하고 있던 무언가 - 이를테면 돈이라든가, 예쁜 색시라든가 - 가 아닌 걸 확인한 나무꾼의 표정은 대놓고 구겨졌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슴은 우물거리는 발음이나마 똑바르게 이야기했습니다.

“혹시 납작하고 단단한 것이 없겠습니까?”
“아, 여기.”

시큰둥하게 내민 손끝에는 판판한 나무판자가 들려 있었습니다. 사슴은 말없이 주둥이로 물어 올린 은색 물체를 그 위에 툭 떨어뜨렸습니다. 제법 묵직한 무게와 뜬금없는 행동에 놀라서 판자 째로 떨어뜨린 은색 물체는 판자 위에서 홀로 이리 데굴, 저리 데굴 구르다 제자리에서 가만히 떨었습니다. 그 모습이 또 귀엽기는 합니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나무꾼의 머리 위에 다시 발음이 명료해진 사슴의 목소리가 툭 떨어졌습니다.

“혹시 ‘관성’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관상은 들어봤다만. 그 점쟁이 말에 따르면 내가 예쁜 색시를 맞아서 평생 행복하게 살….”
“관상 봐주는 사람은 점쟁이가 아니고, 무엇보다 현재 화두는 관상이 아닌 관성이옵니다. 헛소리 마시고 계속 들으시지요. 물체에 아무런 힘이 작용하지 않을 때, 물체가 원래의 운동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성질을 ‘관성’이라고 합니다. 정지해 있던 물체는 계속 정지해 있으려고 하고, 운동하던 물체는 그 운동을 계속 하려고 한다는 이야기지요.
“슬슬 말이 거칠어지는구나. 그게 네 본성이냐.”
“저처럼 착하고 고운 미물에게 그 무슨 잔혹한 말씀이십니까. 어쨌든 마차를 타보신 적이 있으시겠지요? 저 숲 너머 인간 세상에서는 버스라는 마차가 있습니다만, 말 대신 엔진이라는 물건으로 움직입니다. 그 버스를 타면 말입니다, 갑자기 멈춰 설 때 몸이 앞으로 쏠립니다. 버스가 달릴 때 거기 탄 사람들 몸은 버스와 함께 앞으로 향하고 있는데 버스가 갑자기 멈추면 몸만 관성에 따라 앞으로 계속 가려고 하기 때문이지요. 버스가 갑자기 출발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이 정지해 있으려 하기 때문에 몸이 등받이나 뒤쪽으로 넘어가지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제가 드린 물건의 안에는 단단한 관과 구슬이 들어있사옵니다. 아까 내어주신 판자 같은 넓은 판에 그 물건 - 일일이 물건 물건 하기 귀찮으니 그냥 자벌레라 하겠사옵니다만 - 을 얹고 기울이면 자벌레가 꿈틀대며 계속 혼자 움직이는 걸 보셨지요. 왜 이리 되는고 하니, 자벌레를 기울이면 구슬이 한쪽으로 이동하면서 가벼워진 쪽이 올라갑니다. 구슬은 계속 이동하려는 관성에 의해 가벼운 쪽으로 다시 이동하고 이 움직임은 계속 반복됩니다. 그러한 원리이옵니다.”

긴 설명을 끝낸 사슴은 다시 촉촉한 눈망울을 들어 나무꾼을 똑바로 쳐다봤습니다. ‘어때? 신나지? 재미있지? 나 잘했지?’가 가득 담긴 눈망울을 마주한 나무꾼은 어쩐지 거북한 마음에 고개를 돌리며 더듬더듬 말을 꺼냈습니다.

“조, 좋은 말 잔뜩 들었다. 설마 그 말이 선물은 아닐 테고. 이 물건이 선물이냐? 이걸 왜 내게 주느냐?”
“아까 보셨듯이 그 물건의 움직임이 제법 기특하고 또 귀엽습니다. 홀로 지내시느라 쓸쓸하실 때마다 한 번씩 꺼내 보시면 삶이 꽤 재미있어지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준비했사옵니다.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만.”

나무꾼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홀로 지내시느라 쓸쓸하실 때’가 있는 걸 알면 또 다른, 굳이 말하면 자기 몸과 마음을 울리는 그런 욕구를 풀어줄 무언가를 준비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좋다 아니다 말도 없이 한숨만 폭폭 쉬어대고 있는 나무꾼 앞에서 사슴의 눈망울이 다시 울망울망 눈물을 매달기 시작했습니다. 걱정하듯이 고개를 살짝 기울인 사슴이 머뭇머뭇 이야기를 꺼냅니다.

“저어, 마음에 들지 아니하신 겁니까?”
“아니, 선물은 고맙다. 고마운데 말이다….”
“말이다…? 제가 뭘 잘못했사옵니까?”

새침하게 고개를 갸웃대는 사슴 앞에서 나무꾼은 그 날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냥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나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말이다. 내 본능은 이게 아니라고 외치고 있거든?
“허어? 본능이 뭐라고 외치시고 계시는 겁니까?”

사슴의 맑은 눈이 점점 흐려져 갑니다. 하지만 고지식하고 답답할 뿐 아니라 눈치도 꽝인 나무꾼은 전혀 알아채지 못한 채 입을 점점 과감하게 놀려 갔습니다.

“보통 이럴 땐 그 뭐냐, 어여쁜 선녀님을 내 색시로 맞을 수 있도록 이렇게 저렇게 해주는 거 아니었냐? 목욕탕 급습이라던가, 옷을 슬쩍 훔치게 귀띔한다던가, 왜 거 있잖냐.”
“이보쇼.”
“그래, 이보…, 뭐라고?!”

갑자기 돌변한 사슴의 말투에 나무꾼은 잠시 멍해졌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슴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온 얼굴에 띄운 채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앞발을 까닥거리며 나무꾼을 째려봤습니다.

“내 진짜 기가 막히고 코까지 막혀서 말을 못하겠네. 거 곰방대 좀 주실라우.”
“곰방대?!”
“아 달라면 빨리 주쇼. 뒷다리로 차버리기 전에.”

나무꾼은 무서운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사슴 앞에 얌전히 곰방대를 내려놓았습니다. 갈라진 앞발굽 사이에 곰방대를 끼운 사슴은 능숙하게 불을 붙이고 힘차게 빤 다음 가득히 토해냈습니다. 어쩐지 포도청 취조실에서 범인과 5시간쯤 공방을 벌이다 휴식을 취하는 포도부장 같은 기세입니다.

“아이고! 이 양반아, 정신 차리시게. 지금 때가 어느 땐데 그런 소리를 하고 앉았나. 댁이 하려는 행위를 세간에서 뭐라 하는지 아시우? ‘납치강간’이라고, 범죄라고 이 양반아!”
“버, 범죄?”
“그래, 사람이 살다보면 쓸쓸할 때도 있고 그런 법이지. 그런데 그걸 왜 자기 힘으로 극복 못 하나. 본인 힘으로 여자 찾아서 장가를 들던가…. 솔직히 불어보쇼. 노력해본 적은 있수? 그 나이 먹을 때까지 산에 처박혀 있지는 않을 테고, 좋다는 여자 한 둘은 있었을 거 아뇨?”
“그, 그래! 있었다 왜! 있긴 했지만 다들 박색에 나이도 꽤 먹어서는….”
“아이쿠야. 생각해 보쇼. 댁 나이 몇 살? 재산 얼마? 거기에 얼굴에 나이까지 밝혀? 이 양반 알고 보니 도둑놈이네~.”
“뭐, 도둑놈?! 말이 너무 심한 것 아냐?”

이제 숫제 삿대질까지 해가며 화를 버럭버럭 내는 나무꾼과 대조적으로 사슴의 표정은 점점 침통해져 갑니다. 곰방대를 물고 다시 한 번 깊숙이 빨아올린 사슴은, 그래도 여전히 맑은 눈망울을 먼 하늘로 돌리며 나지막이 읊조렸습니다.

“사람이란 말이오, 대저 저가 해온 대로만 하려고 하거든. 이게 참 버스를 탄 것도 아닌데 가던 사람은 계속 가려하고, 멈춰있는 사람은 계속 멈춰 있으려 해. 짝을 찾을 때도 게으른 놈은 끝까지 게을러. 저는 안 움직이고 오는 것만 취하려 들지. 그런데 또 가리는 건 많아. 자기 힘으로 열심히 살아온 삶에 긍지가 있으면 말이오, 마음에 드는 처녀에게 그 긍지를 당당히 보여주면 될 것 아뇨. 해본 적 있수? 솔직히, 없지?”

사슴의 목소리가 담배 연기에 실려 함께 퍼집니다. 어쩐지 기세에 눌려, 그리고 또한 사슴의 말이 사실이기에 할 말을 잊은 나무꾼을 다시 쏘아본 사슴은 곰방대를 길게 뻗어 나무꾼의 가슴을 가리켰습니다.

“그런데 뭐? 선녀의 날개옷을 훔쳐? 붙잡아서 평생 같이 살아? 자기 삶 잘 살아가던 여자 인생 하나 깨끗하게 말아먹고 본인만 행복하면 다요? 그것도 같이 알아온 사람도 아니오, 분위기나 배경이 잘 맞는 사람도 아니오, 마음을 맞춰본 것도 아니오. 그냥 예쁘고 날씬하면 장땡이다~하고, 덜렁 붙잡아서 데려가다니 그건 또 무슨 짓이냐고.”

사슴은 곰방대를 바닥에 패대기치며 벌떡 일어났습니다. 바닥을 구르던 ‘자벌레’를 입으로 물어 올려 나무꾼 앞에 툭 떨어뜨린 사슴은 뒷발을 구르며 콧김을 내뿜었습니다.

“댁 같은 인간에겐 이게 딱 어울리오. 어디 평생 관성에 따라 이리 구르고 저리 굴러봤자 좁은 판 위에서 힘 다 떨어져 바르르 떠는 것도 못할 때까지 꿈틀꿈틀 살아보쇼. 난 가오!”

처음의 가련한 모습은 대체 어디로 갔을까요. 힘차게 숲 저편으로 사라지는 사슴의 꽁무니를 나무꾼은 그저 멍하니 바라봤습니다. 사슴이 일으킨 흙먼지도 희미하게 사라져갈 무렵, 겨우 떨리는 손으로 자벌레를 집어 들어 손바닥 위에 가만히 얹어봅니다. 나무꾼의 손바닥 안에서 이리 꿈틀, 저리 꿈틀 움직이다가 결국 톡 떨어진 자벌레는 숲 저 안쪽으로 데굴데굴 굴러가 버렸습니다. 마치 사슴을 따라가듯이, 또는 나무꾼을 멀리하듯이. 홀로 남은 나무꾼의 옆에는 그저 못 박힌 채 가만히 서 있는 등짐만 쓸쓸히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글 : 김은영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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