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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도 의사소통하며 위협에 맞선다
<KISTI의 과학향기> 제3235호 2018년 10월 22일인간을 비롯한 동물들은 외부에서 공격을 해오면 도망을 가거나 맞서 싸운다. 반면에 식물은 그런 계책을 생각해내지 못할뿐더러 몸을 움직일 수도 없다. 그렇다면 식물은 외부의 공격을 그저 당하고만 있는 것일까? 최근 연구에 따르면 식물 역시 외부로부터의 위협을 감지하고 방어하는 기제를 가지고 있는데, 그 기제의 핵심은 세포 간 의사소통(신호 전달)에 있다. 식물은 외부의 공격으로 상처를 입으면 위험 신호를 몸의 다른 부분에 전달하고 침략자를 쫓기 위한 방어 태세를 갖춘다.
위험 신호의 장거리 운반자, 칼슘 이온
칼슘 이온은 동물의 체내에서 전기적, 화학적 신호를 운반한다고 알려져 있다. 미국 위스콘신-매디슨 대학교의 식물학자 시몬 길로이(Simon Gilroy)와 토요타 마사츠구(Masatsugu Toyota) 박사 연구진은 애기장대(Arabidopsis thaliana)를 대상으로 한 최근 연구에서 식물이 감지하는 위험 신호 역시 칼슘 이온을 통해 전달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연구자들은 칼슘 이온의 양이 늘어난 곳에서 녹색 빛이 나도록 애기장대에 녹색 형광 단백질(GFP, green fluorescent protein) 유전자를 투입하고, 애기장대의 이파리를 가위로 자르거나 애벌레가 갉아 먹게 한 후 칼슘 이온의 움직임이 어떠한지를 추적했다. 그리고 현미경을 통해서 애기장대의 한쪽 잎이 먹히거나 잘려나간 후 몇 초 지나지 않아 해당 위치에 녹색 빛이 들어오고 이 빛이 곧 주변으로 옮겨져 다른 잎들로 퍼져나가는 것을 관찰했다. 특정 부분의 칼슘 신호가 단기간에 장거리를 이동한 것이다.
칼슘 이온은 먼 거리를 이동하면서 방어 기제들을 수반한다. 칼슘 이온이 지나가는 곳에는 스트레스 호르몬인 자스몬산(jasmonic acid)이 만들어지며, 이것은 식물이 물리적으로, 화학적으로 외부의 위협을 방어할 수 있게 해준다. 자스몬산은 세포벽을 단단하게 만들어 먹기 어렵게 만들고, 자스몬산의 산물인 메틸 자스모네이트(methyl-jasmonate)는 공기 중으로 분사되어 곤충의 소화를 방해한다.
동영상 1. 다른 잎이 상처를 받자 칼슘 이온을 방출해 대비하는 모습. (출처: UW-Madison Campus Connection)
세포 간 신호 전달의 개시자, 글루탐산
칼슘 이온이 위험 신호의 운반자라면, 그 신호를 개시하는 것은 무엇일까? 길로이와 마사츠구 연구진에 따르면 칼슘 이온을 활성화시키는 것은 글루탐산(glutamate)이다. 글루탐산은 아미노산의 일종으로 애벌레가 잎을 갉아 먹는 등 외부로부터의 공격이 있은 뒤 세포 외부에 분비되는 물질이다. 세포 외부에 있던 글루탐산은 세포막에 있는 글루탐산 유사 수용체(GLR, glutamate-like receptor)와 결합하고, 그 결과 칼슘 이온 통로(ion channel)가 열리면서 칼슘 이온이 세포 내로 쏟아지게 된다. 이후 칼슘 이온의 분포에 따라 만들어지는 전기적 신호 때문에 칼슘 이온은 세포 간 채널을 통해 먼 곳까지 전달될 수 있게 된다. 글루탐산은 이 장거리 칼슘 신호의 시작을 담당한다.
이러한 글루탐산의 역할 역시 길로이와 마사츠구의 연구를 통해 확인되었다. 아무런 조작을 가하지 않은 애기장대에서는 애벌레가 잎을 먹거나 잎을 가위로 자른 뒤 글루탐산을 묻히면 칼슘 신호가 퍼져나갔지만, 글루탐산 유사 수용체를 발현시키는 유전자를 없앤 애기장대에서는 칼슘 신호가 매우 약하게 나타났다.
동영상 2. 글루탐산을 묻히자 퍼져나가는 칼슘 이온 신호. (출처: UW-Madison Campus Connection)
동물과 닮은 식물의 세포 간 의사소통
식물이 가진 세포 수준의 방어 기제는 이번 연구를 통해 발견되었지만, 그 기제 자체는 생물학자들에게 매우 낯익은 것이다. 포유동물의 신경계에서 유사한 신호 전달 과정이 발견된 바 있으며 글루탐산은 신경세포 간 신호 전달을 매개하는 신경전달물질(neurotransmitter)로서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동물의 신경세포에서도 글루탐산은 수용체와 결합해 이온 통로를 활성화시키고 신경세포 간에 화학적 신호가 전달될 수 있게 한다.
동물의 신경계와 식물의 방어 기제의 신호 전달 체계가 닮아있다는 사실은 동물과 식물이 공통의 조상으로부터 파생되었음을 시사한다. 동물과 식물은 모두 진핵생물(eukaryote, 세포 내에 막으로 둘러싸인 핵을 가진 생물)이면서 다세포 생물이다. 공통 조상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이후 오랜 기간 동안 서로 다른 환경에 적응해온 탓에 겉모습도 자극에 반응하는 방식도 다르지만 기본적인 세포 활동은 매우 유사하다.
길로이와 마사츠구의 연구 결과는 식물이 외부로부터의 위협에 능동적으로 반응하며, 그 과정이 세포 간의 의사소통을 통해 이루어짐을 보여준다. 식물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지만 그 내부에서 일어나는 세포 간의 화학적 신호 전달은 빠르고 지속적이고 또 역동적이다. 이러한 식물의 방어 기제가 동물의 신경계와 닮아있다는 점도 이 연구가 주는 또 다른 메시지이다. 식물의 생리에 대해 아직 모르는 것이 많은 현시점에서 식물과 동물의 세포 기제가 진화적으로 연속되어있다는 관점은 남은 연구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글: 이보윤 서울대학교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일러스트: 유진성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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