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숨겨진 북한의 최고 과학자, 리승기

<KISTI의 과학향기> 제665호   2007년 10월 10일
우리나라에서 과학자를 모델로 우표를 발행한 적은 없다. 그러나 북한은 두 차례나 한 명의 과학자를 기념한 우표를 발행했다. 바로 합성섬유인 ‘비날론’의 발명자 고 리승기 박사(1905~1996)가 주인공이다. 리 박사는 1960년대 초반까지 남북한을 통틀어 가장 크게 이름을 떨친 과학자로, 북한에서는 이례적으로 그에 관한 대중용 전기가 출판될 정도다. 과연 그는 어떤 사람일까.

리 박사는 1905년 전남 담양에서 태어나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5년 일본으로 건너가 마츠야마고등학교를 나왔다. 그 뒤 1931년 교토제국대학 공업화학과를 졸업했다. 훗날 그가 쓴 자서전에 따르면 가난한 형편 탓에 대학 시절 결핵을 앓기도 했지만, 우수한 성적으로 학업을 마쳤다고 한다.

원래 리 박사가 연구하기 원했던 분야는 합성섬유였지만 조선인 출신이 일본에서 직장을 얻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지도 교수였던 기타(喜田)의 추천으로 처음에는 아스팔트를 연구하는 회사에 취직했다. 이곳에서 아스팔트와 관련한 다수의 특허를 취득하는 성과를 올린 리 박사는 곧이어 자신이 원하던 합성섬유를 연구할 기회를 잡는다. 바로 교토제국대 부설 일본화학섬유연구소에 연구강사로 임용된 것이다.

1938년 미국 듀퐁사가 최초의 합성섬유인 나일론을 개발하면서 세계 각국에 합성섬유 연구 열풍이 불었다. 원래 세계적인 비단, 면직물 수출국이었던 일본도 합성섬유 연구에 뛰어들었다. 미국과 달리 일본은 폴리비닐알콜(polyvinylalcohol, PVA) 계열의 고분자 화합물을 원료로 쓸 수 있는지 연구했다. 나일론은 석유를 원료로 필요했지만 폴리비닐알콜은 석회석을 원료로 했기 때문에 석유가 나지 않는 일본에 적합했다. 또 PVC로 만든 합성섬유는 나일론이나 아크릴 섬유에 비해 수분을 흡수하는 성질이 뛰어나 면직물을 대용하는데 유리했다.

마침내 1939년 리 박사는 PVC로 ‘합성섬유 1호’를 개발했다. 합성섬유 1호는 단순한 개인적인 영광 그 이상의 것이었다.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 리 박사가 거둔 성공은 조선인의 자랑이 되기에 충분했다. 과학잡지 ‘과학조선’은 조선인 과학자의 대표적인 인물로 리승기를 지목했고, 종합잡지 ‘조광’(朝光)도 ‘세계의 학계에 파문을 던진 합성1호의 기염-리승기 박사의 고심 연구달성’(1939년 12월호)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실었다.

이를 두고 리 박사는 자서전에서 제11회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를 거론하며 자신의 연구 성과가 일본 과학의 성과로 귀속된다는 사실에 무척 안타까워했다. 게다가 리 박사의 연구가 공업화의 가능성을 열어주기는 했지만 완전한 실용화를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았다.

우선 합성섬유 1호는 뜨거운 물에 닿으면 쉽게 수축됐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 열처리를 하는 경우 착색되는 문제점이 있었다. 리 박사는 제조 공정 중에 포르말린 대신 아세트알데히드를 넣는 방법을 고안해 1942년 무렵까지 합성섬유 1호의 대부분 문제를 해결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연구가 서둘러 상업화되는 것을 두려워했다고 전해진다. 그것은 당시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을 벌이고 있어서 자신의 연구가 전쟁 수행을 위한 군수품 생산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결국 리 박사의 의도대로 합성섬유 1호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상업화에 들어가지 못했다.

한편 리 박사는 헌병에게 “일본은 패망할 것”이라고 말한 것을 빌미로 일본 오사카 감옥에 갔다가 거기서 광복을 맞았다. 고국으로 돌아온 리 박사는 서울대 공대학장, 대한화학회 부회장을 역임했지만 얼마 뒤인 1950년 7월 31일 기차를 타고 서울을 떠나 평양에 간다. 리 박사의 월북 배경을 둘러싸고 어떤 이들은 그가 사상적으로 공산주의에 기울었다고 풀이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적어도 네다섯 차례에 걸친 끈질긴 월북 권유를 물리쳤고 자본주의나 공산주의의 이념에 대해서는 크게 상관하지 않은 사람이다.

다만 당시 남한은 과학자에 대한 지원이 거의 없다시피 했던 반면 북한은 해외에 거주한 조선 과학자까지 초빙해서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적극 지원했다. 아마 리 박사에게 흥남의 질소비료공장에서의 근무와 비날론연구소 설립을 제안한 것이 그가 월북한 가장 큰 요인으로 추측된다. 흥남의 질소비료공장은 당시 세계적인 규모를 자랑하는 대공장으로, 카바이드와 아세틸렌, 아세트산, 아세트알데히드 등을 생산했다. 이들은 모두 합성섬유를 만드는 원료였다.

김일성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1961년 연간 2만톤의 비날론을 생산하는 공장이 완공됐다. 석회석과 무연탄, 전기를 이용해 만든 카바이드를 기본 원료로 삼아 만드는 비날론(Vinalon)은 비닐알코올을 축약한 것으로 일본에서는 비닐론(Vinylon)이라 불린다. 그 뒤 ‘주체사상’이 담론으로 등장하면서 비날론은 ‘주체섬유’로 불릴 만큼 획기적인 성과였다.

무엇보다 비날론은 조선인인 리 박사가 개발했고, 질감이 조선의 전통 옷인 면과 비슷하며, 북한에 풍부하게 매장된 석회석을 원료로 이용한다는 점에서 북한의 공업화와 체제 건설의 역사와 나란히 서술되고 있다. 북한 정권은 리 박사에게 노력영웅 칭호와 제1회 과학부문 인민상을 수여했다. 병으로 드러누웠을 때 김일성이 그에게 100년 된 산삼을 보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역사에서 ‘만약’이란 가정은 무의미하지만 광복 이후 남한에서 과학자를 우대했다면 리 박사가 서울대 응용화학과에서 길러낸 제자들과 함께 집단으로 월북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미군정이 한국을 일본의 영토로 간주해 서울대의 학제개편을 미국식으로 강요한 탓에 담양으로 낙향했을 때도 “아편쟁이가 아편을 잊지 못하듯 비날론을 잊을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한국인 과학자의 해외 두뇌유출을 걱정하는 것처럼 과학자에게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일은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대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글 : 서금영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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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직
  • 평점   별 4점

아쉽군요. 해방후 남한에서 과학자들에게 좀 더 관심을 가졌다면 이승기박사같은 인재를 놓치지 않았을 텐데요.

2009-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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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란
  • 평점   별 5점

공감이 가는 이야기네요. 성과를 중요시하다 보니 과학연구의 성과에 대해 오랜기간 기다리지 못하는것 같아요. 국가적으로 과학정책을 수립하여 예산도 넉넉하게 지원해 주고 마음껏 연구할수 있는 연구 환경을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네요.

2009-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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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문
  • 평점   별 5점

자랑스런 이야기 입니다. 김일성이 배려했을 정도의 인물이고 김일성이도 사람볼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2008-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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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ks
  • 평점   별 5점

우리가 잘 살수 있는것은 과학기술의 향상입니다.우수한 인재가 없어서 과학기술이 향상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학교에서 과학교육을 할성화 시키기 위해 과학실현대화 사업을 학교마다 하였습니다.과학실 현대화를 시킨다고 과학기술이 발전되는 것이 아니고 사회에서 과학자와 이공계출신을 우대하면 우수한 두뇌를 확보 하리라 생각됩니다.과거에 기능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면 환영 퍼레이드가 열렸습니다.리승기 박사의 경우를 보고 이공계출신을 우대하는 정책과 사회분위기를 조성해야 하겠습니다.

2007-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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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점   별 5점

리승기 박사는 존경할만 하지만 유학가서 돌아오지 않는다고해서 과학자를 부정적으로 보면 안된다고 생각해요. 우리나라에 돌아와서 정신적으로 버텨보려 하지만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전혀 지지해주지 않아요. 물질적으로는 지원해 주지 않아도 그렇게 슬프지 않지만 쟤 왜 한국왔어 그냥 빵빵한 외국에 있지.. 술마시고 놀지 왜 한국와서 공부만한데 공부벌레같으니.. 이런소리 듣지요. 공부하고 싶은데 술 안마신다고 따 시키고 그러는데 오겠습니까. 또 순수과학 하는 사람들은 이념에 신경을 쓰지 않고 자신이 연구를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에 훨씬더 신경을 많이 쓰기 때문에 (절대적인 가치를 추구하려고 하지요) 안정적이지 못하고 정권에 따라 지원이 달라지는 한국에 올리가 만무하지요. 저는 무조건 과학자는 외국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우리나라 이름 달고 나가지 않습니까. 우리나라는 우리나라사람이기만 하면 어느나라에 있던지 신경쓰지 않으므로 외국가서 외국 자금으로 연구하면, 우리나라는 우리 돈 안들어서 좋고(물론 경제적인 이득은 없겠죠.) 과학자는 과학할 수 있어서 좋고. 하워드씨만 봐도 알지 않아요. 그냥 피 쫌 섞였으면 좋다고 아싸리하는게 우리나라에요.

2007-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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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재춘
  • 평점   별 5점

대한민국은 과학과 기술이 성장의 동력원인데.... 과학자들의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 제공에 한 표~~~

2007-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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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우
  • 평점   별 5점

과학자의 자세가 바로 이것이구나 느낍니다.

2007-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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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점   별 5점

리승기 과학자는 한인으로 세계처음 인조견을 발명한 분이라고 본인이 중학생때 들었습니다,광복후 우리나라는 정치,경제, 이념적으로 혼돈기 였기에 휼륭한 과학자를 유치하지 못 하였습니다 일제 말기에 본토 폭격으로 중공업이 가동할수없어 한국에 이전하였는데 남쪽은 방직공장 북쪽은 중공업 공장을 설치했습니다 남한에서는 무엇 하나 공제품을 생산할수 없는 형편이며 미국의 원조는 식량품( 밀가루,유분 설탕,알랑미)정도였다 625전란후로 대한민국이 IT,자동차 ,콤퓨터등등 많은 생산품과 Plant수출로 놀라운 발전을 이루웠다 이제 휼륭한 과학자를 양성해서 조국의 발전에 박차를 가하야할 이시점에 우수한 두뇌는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는 과학자는 몇% 안된다고 신문지상에서 읽었습니다 1952년도 삼대성이론을 반박하는 논문으로 노벨상을 수상한 중국인 젊은 두 과학자는 미국네서 존경과 최대의 대우를 뿌리치고 중국 본토로 귀국했습니다 그당시 중국은 공산화로 어려운시기였으나 조국을위해 두 젊은 박사가 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과 대조 적이지요.
그뿐이겠습니까 우리와 Rival국인 중국,대만에 IT 비밀서류를 팔아먹는 파렴치한 인간 이완영과 같은 매국노가 았다는것을 예의 주시해야 됨니다 북한에서는 리박사의 공로를 인정하고 영웅칭호를 주어 기념 한담니다 우리도 많은 과학도에게 후한 대우를 하며 불편함이 없이 연구에 몰두 할수 있도록 해야 되겠습니다

2007-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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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준
  • 평점   별 5점

먹고 살 길을 열어주는 과학의 힘에 모두들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면 좋겠습니다.

2007-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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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 평점   별 5점

마음 편히 연구에 몰두할 수 없었던 환경과 남북이 하나되지 못한 광복 모든 것이 가슴아프네요.

2007-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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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애
  • 평점   별 5점

잘 읽었습니다. 자랑스러우면서도 가슴아픈 이야기네요. 북한의 뛰어난 과학자들이나 북한의 과학적 성과에 대해서 좀 더 알려져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2007-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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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비
  • 평점   별 5점

아주 잘 봤습니다. 항상 인문계열에만 치중을하는 우리나라가 정말 한탄스럽습니다. 윗대가리들이 모두 인문계열이니 공학/과학이 대우를 못받죠.. 확 바꿔야지..

2007-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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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원
  • 평점   별 5점

정말 좋은 글입니다..

뭐... 그때나 지금이나 과학도,공학도는 찬밥인건 마찬가지지만요......

2007-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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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한
  • 평점   별 5점

이공계열을 우대해야하고, 특히 순수 과학을 하는 사람이 밥먹고 사는데 걱정이 없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머리 좋은 사람이 의대에 가는게 국가 발전에 얼마나 도음이 될까요?

2007-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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