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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형광펜 표시한 건 왜 복사가 안 될까?
<KISTI의 과학향기> 제1377호 2011년 06월 27일
학교에서 돌아 온 태연, 책가방을 휙 집어던지며 분노의 3단 고음을 질러댄다. 눈은 이미 이글아이다.
“악!!! 내 기필코 복수하고 말테다. 말자, 이 나쁜 계집애!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짐승!!”
“태연아, 친구들이랑 사이좋게 좀 지내라고 했더니 또 싸운 거야?”
“싸운 게 아니라 배신에 몸을 떠는 거라고요. 오늘 단원평가를 봤는데 말자 그 나쁜 계집애 때문에 50점밖에 못 맞았어요. 틀림없이 책에서 중요한 부분을 형광펜으로 다 표시한 다음에 복사해 준대놓고선 아무 표시도 안 된 복사지를 줬다고요. 그 복사지를 얻기 위해 말자한테 손바닥이 닳도록 아부한 거랑, 그동안 갖다 바친 수십 개의 사탕이 억울해서 못 견디겠어요! 내가 아무리 위협적인 경쟁상대라 해도 이런 저질 플레이는 아닌 거죠. 안 그래요, 아빠?”
“음…, 정확히 두 가지 점에서 심각한 의문을 제시하고 싶구나. 네가 3년 째 전교 1등인 말자의 경쟁상대라는 언빌리버블한 부분과 형광펜으로 표시한 내용이 흑백 프린터로 복사되기를 바란다는 어이없는 바람 말이야.”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럼 형광펜으로 쓴 글씨는 복사가 안 된다는 말씀이세요? 아빠까지 저 50점 맞았다고 무시하시는 거예요?”
“진짜야. 프린터와 형광펜의 원리를 알면 아주 간단한 얘기지. 프린터 유리 위에 원본종이를 놓고 복사버튼을 누르면 불빛이 윙~ 하면서 지나가는 거 봤지? 이때 종이의 흰 부분에 닿은 빛은 반사가 되지만 글자가 있는 검은 부분은 빛을 모두 흡수하기 때문에 반사가 되지 않아. 그럼 반사된 빛은 어디로 가느냐? 바로 (+)전하를 띠고 있는 쇠로 만든 원통(드럼)으로 가게 돼 있어. 그러면 빛을 받은 부분의 드럼은 (-)전하로 바뀌게 되지. 이때 프린터가 (-)전하를 띠고 있는 토너 가루를 뿌리면 드럼의 (-)전하인 부분, 즉 빛이 반사된 원본종이의 흰 부분에는 토너 가루가 붙지 않아. 반면 글씨가 빛을 흡수해 드럼에 아무런 빛도 반사되지 않았던 부분에는 토너 가루가 붙게 되지. 이 상태에서 섭씨 180도 정도의 고열을 가하면 토너 가루들은 종이에 영원히 달라붙게 된단다.”
“아, 그래서 인쇄한 종이가 뜨끈뜨끈한 거구나. 인쇄종이를 잡으면 언제나 뜨끈한 호빵이 먹고 싶어요. 쩝, 또 생각나네. 그런데 그거랑 형광펜이랑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예요?”
“자, 그럼 이번에는 형광펜에 대해 설명해줄게. 형광(螢光, fluorescence)이란 형광물질이 빛의 자극에 의해서 발광하는 현상을 말한단다. 쉽게 말해서 빛에너지를 받은 물질이 새로운 형태의 빛을 다시 내뿜는 거지. 프린트를 처음 시작할 때 일단 원본 종이에 불빛부터 비춘다고 방금 얘기했지? 흰 부분은 빛을 반사하지만 글씨 부분은 빛을 흡수해 버린다고 말이야. 그런데 형광펜으로 쓴 부분은 빛을 받아 새로운 형태의 빛을 방출하기 때문에 프린터는 이 부분을 그냥 흰 색으로 인식해 버린단다. 당연히 복사가 될 수 없겠지!”
아빠의 설명을 들은 태연은 급 우울해진다.
“그럼 나는 이제 어쩌라고요. 애들이 요점 체크해둔걸 복사해서 공부하지 않으면 또 50점을 맞을 테고, 공부 잘하는 애들은 몽땅 다 형광펜만 써 대고. 애들 형광펜을 모조리 없애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요.”
“음…, 형광펜 복사가 그렇게도 중요한 것이라면 흐릿하게나마 복사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 바로 복사기의 민감도를 높이는 거지. 복사기에 있는 ‘진하게’ 버튼을 누르면 복사기가 흰색과 형광색이 빛을 방출할 때의 미묘한 흡수량 차이를 구분해서 흐릿한 회색으로 인쇄를 한단다. 또 형광펜 색에 따라 복사되는 정도가 달라. 가장 복사가 안 되는 것이 노란색 형광펜이고 파란색이나 분홍색 형광펜은 비교적 표시 나게 할 수 있거든. 그러니까 정말로 중요한 부분을 복사해야 한다면 형광펜 색깔을 잘 선택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겠지.”
여기까지 듣던 태연은 갑자기 뭔가가 생각난 듯 공부방으로 들어가 열심히 숙제를 한다. 잠시 후 태연이 가지고 나온 건 온통 노란색 형광펜으로 쓴 사회과목 발표자료.
“내일 사회 시간에 제가 조사해 온 자료를 가지고 말자가 스토리를 만들어서 발표를 하기로 했거든요. 이걸 복사해서 갖다 주면 말자가 얼마나 당황해할지, 홍홍홍~ 벌써부터 신나요. 전 틀림없이 숙제를 해간 거니까 저한테 원망도 못 할거고요. 홍홍~.”
“아휴…, 어쩜 이럴 때만 그렇게 머리가 좋니. 제발 잔머리 그만 쓰고 이제부터는 스스로 공부 좀 하라고!!”
글 : 김희정 과학칼럼니스트
“악!!! 내 기필코 복수하고 말테다. 말자, 이 나쁜 계집애!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짐승!!”
“태연아, 친구들이랑 사이좋게 좀 지내라고 했더니 또 싸운 거야?”
“싸운 게 아니라 배신에 몸을 떠는 거라고요. 오늘 단원평가를 봤는데 말자 그 나쁜 계집애 때문에 50점밖에 못 맞았어요. 틀림없이 책에서 중요한 부분을 형광펜으로 다 표시한 다음에 복사해 준대놓고선 아무 표시도 안 된 복사지를 줬다고요. 그 복사지를 얻기 위해 말자한테 손바닥이 닳도록 아부한 거랑, 그동안 갖다 바친 수십 개의 사탕이 억울해서 못 견디겠어요! 내가 아무리 위협적인 경쟁상대라 해도 이런 저질 플레이는 아닌 거죠. 안 그래요, 아빠?”
“음…, 정확히 두 가지 점에서 심각한 의문을 제시하고 싶구나. 네가 3년 째 전교 1등인 말자의 경쟁상대라는 언빌리버블한 부분과 형광펜으로 표시한 내용이 흑백 프린터로 복사되기를 바란다는 어이없는 바람 말이야.”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럼 형광펜으로 쓴 글씨는 복사가 안 된다는 말씀이세요? 아빠까지 저 50점 맞았다고 무시하시는 거예요?”
“진짜야. 프린터와 형광펜의 원리를 알면 아주 간단한 얘기지. 프린터 유리 위에 원본종이를 놓고 복사버튼을 누르면 불빛이 윙~ 하면서 지나가는 거 봤지? 이때 종이의 흰 부분에 닿은 빛은 반사가 되지만 글자가 있는 검은 부분은 빛을 모두 흡수하기 때문에 반사가 되지 않아. 그럼 반사된 빛은 어디로 가느냐? 바로 (+)전하를 띠고 있는 쇠로 만든 원통(드럼)으로 가게 돼 있어. 그러면 빛을 받은 부분의 드럼은 (-)전하로 바뀌게 되지. 이때 프린터가 (-)전하를 띠고 있는 토너 가루를 뿌리면 드럼의 (-)전하인 부분, 즉 빛이 반사된 원본종이의 흰 부분에는 토너 가루가 붙지 않아. 반면 글씨가 빛을 흡수해 드럼에 아무런 빛도 반사되지 않았던 부분에는 토너 가루가 붙게 되지. 이 상태에서 섭씨 180도 정도의 고열을 가하면 토너 가루들은 종이에 영원히 달라붙게 된단다.”
“아, 그래서 인쇄한 종이가 뜨끈뜨끈한 거구나. 인쇄종이를 잡으면 언제나 뜨끈한 호빵이 먹고 싶어요. 쩝, 또 생각나네. 그런데 그거랑 형광펜이랑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예요?”
“자, 그럼 이번에는 형광펜에 대해 설명해줄게. 형광(螢光, fluorescence)이란 형광물질이 빛의 자극에 의해서 발광하는 현상을 말한단다. 쉽게 말해서 빛에너지를 받은 물질이 새로운 형태의 빛을 다시 내뿜는 거지. 프린트를 처음 시작할 때 일단 원본 종이에 불빛부터 비춘다고 방금 얘기했지? 흰 부분은 빛을 반사하지만 글씨 부분은 빛을 흡수해 버린다고 말이야. 그런데 형광펜으로 쓴 부분은 빛을 받아 새로운 형태의 빛을 방출하기 때문에 프린터는 이 부분을 그냥 흰 색으로 인식해 버린단다. 당연히 복사가 될 수 없겠지!”
아빠의 설명을 들은 태연은 급 우울해진다.
“그럼 나는 이제 어쩌라고요. 애들이 요점 체크해둔걸 복사해서 공부하지 않으면 또 50점을 맞을 테고, 공부 잘하는 애들은 몽땅 다 형광펜만 써 대고. 애들 형광펜을 모조리 없애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요.”
“음…, 형광펜 복사가 그렇게도 중요한 것이라면 흐릿하게나마 복사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 바로 복사기의 민감도를 높이는 거지. 복사기에 있는 ‘진하게’ 버튼을 누르면 복사기가 흰색과 형광색이 빛을 방출할 때의 미묘한 흡수량 차이를 구분해서 흐릿한 회색으로 인쇄를 한단다. 또 형광펜 색에 따라 복사되는 정도가 달라. 가장 복사가 안 되는 것이 노란색 형광펜이고 파란색이나 분홍색 형광펜은 비교적 표시 나게 할 수 있거든. 그러니까 정말로 중요한 부분을 복사해야 한다면 형광펜 색깔을 잘 선택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겠지.”
여기까지 듣던 태연은 갑자기 뭔가가 생각난 듯 공부방으로 들어가 열심히 숙제를 한다. 잠시 후 태연이 가지고 나온 건 온통 노란색 형광펜으로 쓴 사회과목 발표자료.
“내일 사회 시간에 제가 조사해 온 자료를 가지고 말자가 스토리를 만들어서 발표를 하기로 했거든요. 이걸 복사해서 갖다 주면 말자가 얼마나 당황해할지, 홍홍홍~ 벌써부터 신나요. 전 틀림없이 숙제를 해간 거니까 저한테 원망도 못 할거고요. 홍홍~.”
“아휴…, 어쩜 이럴 때만 그렇게 머리가 좋니. 제발 잔머리 그만 쓰고 이제부터는 스스로 공부 좀 하라고!!”
글 : 김희정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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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m
2011-11-26
답글 0
태연이 캐릭터가 좀 엉뚱하긴 해도 귀여운 맛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어째 좀 사악하게 느껴지네요 ㅋㅋ
2011-06-28
답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