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새벽잠 없는 할머니, 알고 보니 진화의 결과?

<KISTI의 과학향기> 제3006호   2017년 09월 13일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 자다 말고 화장실에 다녀온 태연이 벌벌 떨며 아빠를 깨운다.
 
“아빠! 하, 할머니가 이상해요!”
 
“왜, 어디 편찮으시대?”
 
“그게 아니라, 할매괴담 이라고요! 화장실에서 나오면서 할머니 방을 흘낏 봤는데, 할머니가 구미호처럼 머리를 하얗게 풀어헤치시고는 거울 앞에 가만히 앉아계시는 거예요. 너무 무서워서 문 뒤로 잠깐 숨었더니, 이번에는 할머니가 스르륵 밖으로 나가시더라고요. 제가 또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잖아요. 그래서 몰래 할머니를 따라갔는데, 글쎄 공원에 머리가 하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잔뜩 모여 계셨어요! 너무 무서워욧!”
 
“난 또 뭐라고. 우리를 지켜주시려고 다들 일찍 일어나신 거야.”
 
“예? 무엇으로부터요? 귀신으로부터? 아님 좀비로부터?”
 
“넌 이해되지 않겠지만, 나이가 들수록 초저녁에 일찍 잠들고 새벽잠은 점점 줄어든단다. 노인들은 수면시간도 성인의 7~8시간보다 적은 평균 6.5시간에 불과하지. 자주 깨고, 한 번 깨면 쉽게 잠들지 못하는 등 수면의 질도 떨어지고 말이야. 최근까지 과학자들은 이런 증상을 인체가 노화되면서 일명 수면호르몬으로 불리는 멜라토닌이 줄어들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노인성 불면증’이라는 질병으로 여겼던 거지. 실제로 노령인구의 20~40%가 노인성 불면증을 겪는 것으로 알려져 있단다.”
 
“그런데요? 그게 아니에요?”
 
멜라토닌이 줄어들게 된 더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는 거야. 노인들이 맹수로부터 가족을 보호하는 역할을 맡는데 적합하도록 새벽잠이 사라지게 진화했다는 거지. 노인은 경험이 많고 슬기롭기 때문에 이들이 밤이나 새벽에 깨어있다면 맹수의 공격에 훨씬 현명하게 대처했을 거야. 물론 원시 인류의 얘기이긴 하지만 말이야.”
 
“와, 신기하다. 어르신들이 불침번을 잘 설 수 있게 진화했다는 거네요?”
 
“그렇지. 심리학자들은 쥐나 고슴도치가 선잠을 자며 주변을 경계하는 습관 덕분에 생존확률이 높아진 것처럼, 육체적으로 약한 인간도 주변 경계를 위해 특별한 능력을 키우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했단다. 그래서 미국 듀크대 연구팀이 아프리카 탄자니아의 원시부족인 하드자족의 수면패턴을 20일에 걸쳐 조사했는데, 놀랍게도 수면시간에도 구성원의 3분의 1 이상은 늘 깨어 있거나 선잠을 자는 것으로 드러났단다. 부족원이 동시에 잠든 시간은 전체 220시간의 수면시간 가운데 단 18분에 불과했고. 누군가는 계속해서 불침번을 섰다는 거야.”
 
“그러니까, 그 누군가가 대부분 어르신이었던 거네요?”
 
“그렇지. 연구팀은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나이가 들수록 조금 자고 새벽에도 일찍 일어나도록 진화했다는 이론에 ‘잠 못 드는 조부모 가설’이라는 이름을 붙였단다. 할아버지·할머니가 잠을 줄여가면서까지 가족을 보호했다는 게 좀 짠하지? 더 이상 맹수로부터 가족을 보호할 필요가 없는 세상이 됐지만 자손을 안전하게 지키려는 어르신들의 마음은 아직도 그대로가 아닐까 싶구나.”
 
“흑, 꼭두새벽부터 깨서 공원을 서성이는 어르신들을 고마운 마음으로 다시 바라봐야겠어요.”
 
“그렇지만 새벽잠이 줄어든 어르신을 자연스럽다고 여길 수만은 없어. 단지 나이가 들어 그런 게 아니라, 두뇌의 전두엽 기능이 떨어져 생기는 치매나 기억력장애의 초기증상일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그러니 어르신의 불면증이 갑자기 심해졌다면 꼭 병원에 가서 다른 원인이 있는 건 아닌지 확인해봐야 한단다. 또 우울증 때문에 잠이 줄어든 것일 수도 있어요. 노년이 되면 쉽게 외롭고 상실감이 커질 뿐만 아니라, 각종 호르몬 분비도 잘 되지 않아서 우울증에 걸릴 가능성이 상당히 커진단다. 30% 가까운 노인들이 우울증을 겪고 있으며, 이 때문에 노인 자살률이 높아진다는 연구결과도 있어. 그런데 우울증에 걸리면 약 80%의 사람들이 동시에 불면증을 겪게 되거든. 그러니까 어르신의 불면증이 심하다면 우울증 검사도 반드시 해봐야 한단다.”
 
이때 어두컴컴한 새벽공기 속에서 흰 머리를 풀어헤친 할머니가 스윽 들어와 태연과 아빠에게 다가온다. 틀니를 빼두셨는지 씨익 웃는 미소 안쪽으로 흰 치아 대신 검은 동굴이 보인다. 공포영화의 한 장면이 따로 없다.
 
“평생 우리를 보호해주느라 잠도 못 주무시고 우울증 가능성까지 커진다니……. 마음이 너무 아파아아아아악! 할머니, 제발 소리 없이 다니지는 말아주세요!”
 
“어, 엄마! 제발 머리 좀 묶으면 안 될까?”
 
“으흐흐, 이러고 다니니까 전설의 고향 같으냐? 으흐흐, 내가 아직도 니 할미로 보이는겨? 난 어린애 간을 빼먹는 할매귀신이다아아~”
 
“태연아, 개그본능이 살아있는 걸 보니, 할머니는 절대 우울증엔 걸리지 않으실 것 같구나아아악! 엄마, 무섭다구요오!”
 
글: 김희정 작가 / 일러스트: 김석 작가
평가하기
아지타토
  • 평점   별 5점

재미있는 정보네요. 글도 정말 웃기고 유익해서 금방 읽을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017-09-13

답글 0

swyhun89
  • 평점   별 5점

좋은 이야기를 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작은 것에도 역시 과학의 지혜와 지식이 숨어 있다는 것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내용과 글과 정보를 부탁드립니다. 다시 한 번 고맙습니다...!

2017-09-13

답글 0

추천 콘텐츠
인기 스토리
쿠키를 지원하지 않는 브라우저이거나 브라우저 설정에서 쿠키를 사용하지 않음으로 설정되어 있는 경우 사이트의 일부 기능(로그인 등)을 이용할 수 없으니 유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메일링 구독신청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