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동물들의 막장 결혼 드라마

<KISTI의 과학향기> 제970호   2009년 08월 19일
아아, 지구촌 곳곳의 생생한 소식을 전하는 과학향기 방송입니다. 지금 저희는 스코틀랜드 북부 노스로나 섬의 해안에 나와 있습니다. 해안을 보십시오. 저 검은 회색의 카펫은 바로 바다표범들입니다. 바다표범은 수컷 한 마리가 7~8마리의 암컷을 거느리는 일부다처제로 유명한데요. 이제부터 바다표범 수컷을 만나 결혼생활의 비결을 들어보겠습니다.

과학향기 : 바다표범 씨, 우선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바다표범 : 저로 말하자면 키는 2.2미터, 몸무게는 300kg의 참 볼만한 체구를 갖고 있습니다. 이 당당한 체구로 다른 수컷들과의 싸움에서 이겨 가장 모래가 곱고 바람이 불지 않는 곳에 제 구역을 차지할 수 있었지요.

과학향기 : 좋은 위치에 자기 구역을 만드는 게 아내를 많이 두는데 도움이 되나요?
바다표범 : 그거야 두말할 나위가 없죠. 인간들도 좋은 집, 좋은 차가 있으면 결혼상대로 인기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 바다표범도 마찬가지죠. 좋은 구역을 차지하기 위해 수컷들끼리 피 흘리며 싸우는 이유는 다 암컷들을 유혹하기 위해서랍니다. 저는 그 싸움의 승자였지요.

300kg의 거구 바다표범은 흐뭇한 얼굴로 자신의 암컷들을 내려다보았다.

과학향기 : 부인이 8명이나 되는데, 다 어떻게 만나셨는지? 부인이 많다 보면 문제도 많을 것 같습니다. 부부싸움도 남들 8배로 하게 되나요? 싫다고 떠난 부인이라든가…?
바다표범 : 험, 듣기 곤란한 소리군요. 전 암컷들 꽁무니를 쫓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할 필요가 없었지요. 해변에 구역을 정하고 나면 암컷들이 저한테 반해서 자발적으로 제 하렘에 들어오는 겁니다. 간혹 건방지게 말을 듣지 않거나 도망치려는 암컷도 있지요. 그러나 제 육중한 지느러미로 곤장을 맞거나 거대한 몸통에 눌리면 딴 생각을 못하지요. 이곳은 100% 저의 지배하에 있습니다.

과학향기 :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아시다시피 인간들은 일부일처제를 고수하고 있어 바다표범 씨의 결혼생활에 궁금한 점이 많습니다. 저희 인간들은 키나 몸무게는 바다표범들에 한참 왜소하지만, 몇 가지 잔 기술을 갖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유전자감식을 통해 친자여부를 확인하는 건데요. 저희 인간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친자 여부 확인을 의뢰한 열 건 중 셋은 실제로 친자가 아니더라는 다소 충격적인 결과를 얻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완전해 보이는 결혼 관계도 속사정은 알 수 없다는….

바다표범 : 아니 그럼, 내 자식들이 다른 수컷들의 자식일 수도 있다는 겁니까! 아니 이거야 원. 별 소리를 다 듣겠군!

바다표범 수컷은 불쾌한 얼굴로 더 이상의 인터뷰를 거절하고 등을 돌렸다.
인터뷰를 시작한 때부터 바다수컷의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왕의 총애를 받고 싶어 스스로 왕 가까이 오는 암컷은 없었다. 몸무게가 육중한 암컷들은 오히려 영역의 가장자리에 머물고 있었다. 그 암컷들은 수컷의 감시를 피해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 우리는 이미 오래 전부터 바다표범 수컷의 하렘을 관찰해오고 있었다. 그리고 무례하지만 동의 없이 그의 자손들에 대해 인간의 잔기술로 친자 확인 검사를 실시했다. 결과? 인간이나 바다표범이나 별다를 바 없었다. 아기 바다표범의 3분의 1이 그의 자손이 아니었다. 암컷들은 어두운 밤, 안개가 짙은 밤, 그리고 때로는 낮에 물속에서 연인을 만나 사랑을 나눠왔던 것이다. 자신의 왕국이 완전무결하다는 건 수컷의 착각에 불과했다.

사실 암컷을 많이 거느린 왕이 된다는 건 꼭 좋은 일만이 아니다. 늘 다수의 암컷들을 감시해야 하고, 도전하는 다른 수컷들과 결투를 벌여야 한다. 짝짓기 시기에는 물고기 사냥도 나가기 힘들다. 찬란한 왕 노릇은 고작해야 2~3년, 그 뒤로는 뒷방 신세다.

그리고 고작 15세가 되면 죽음을 맞는다. 왕국을 이룬 바다표범 수컷이 알면 기가 막힐 노릇이 또 있으니, 그건 남의 암컷을 몰래 만나며 자식만 낳은 얌체 수컷들의 경우 수명이 40세에 이른다는 점이다.

<바다표범의 물고기 사냥. 동아일보 자료사진>


체구가 크고 힘이 좋은 능력 있는 수컷들이 꼭 자손을 많이 퍼트리는 것은 아니다. 바다표범뿐 아니라 다른 동물과 곤충들 사이에서도 힘없고 작은 수컷들이 자기 종족을 퍼트리기 위해 갖은 방법과 노력을 기울인다.

몸집이 작은 연어 수컷들은 큰 수컷들이 교미를 할 때 주위를 빙빙 돌다 순식간에 사정을 하고 도망간다. 힘으로는 당할 방법이 없으니 도둑장가를 가는 것이다.

수컷 빈대들은 좀 더 엽기적인 일을 벌인다. 아프리카 빈대인 자일로카리스는 다른 수컷에게 정자를 사정한다. 일종의 동성 강간으로 보이는 이 행위의 목적 역시 자손 번식에 있다. 다른 수컷에게 사정된 정자는 상대의 수정관 혹은 정관 속으로 이동해 살아 있다가, 이 수컷이 암컷과 교미할 때 본인의 정자와 함께 암컷에게 전달된다. 다른 수컷들을 자신의 정자를 전달하는 배달부로 사용하는 것이다. 암컷과 직접 교미하지 않아도 자신의 자손이 태어날 수 있도록 말이다.

혼외성교를 막기 위한 동물들의 몸부림 역시 처절하다. 검은날개물잠자리와 난쟁이문어 그리고 일부 상어는 암컷과 교미하기 전 특수한 음경이나 촉수를 사용해 다른 수컷이 남긴 정액을 제거한 후 사정한다. 암컷이 여러 수컷과 교미할 경우, 맨 마지막에 교미한 수컷의 정자가 수정에 성공할 확률이 가장 높다.

그래서 자신의 정자가 수정될 확률을 높이기 위해 잦은 교미를 시도하는 수컷들도 있다. 일부 수컷들은 교미 후 분비물을 이용해 다른 수컷의 접근을 막는 정조대 역할을 하는 교미마개를 만들기도 한다. 암컷들이 다른 수컷에게 눈을 돌리지 않는다면 굳이 할 필요가 없는 노력들이다.

불륜, 패륜, 강간, 강제 낙태 등 어이없는 설정들로 이루어진 우리나라 ‘막장’ 드라마들. 사실 알고 보면 동물세계에선 흔히 볼 수 있는 일들이다. 인간도 동물이니 당연하다고 웃어 넘기기란 껄끄럽지만 말이다.

글 : 이소영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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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ㅎ
  • 평점   별 5점

참 재밌네요~

2009-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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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 평점   별 5점

와, 정말 재밌네요 ^^

2009-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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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존중
  • 평점   별 5점

지나친 경쟁은 오히려 개체간의 진화를 더 후퇴시키는건 아닌건지~ 환경에 적응하는 진화가 아닌 번식을 위한 진화랄까..

2009-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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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2
  • 평점   별 4점

아주 적절한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위 의견에 동의합니다

2009-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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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희
  • 평점   별 5점

멋진정보 감사합니다.

2009-08-25

답글 0

박유라
  • 평점   별 5점

가상인터뷰^ ^ 재미있었습니다~!

2009-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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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래
  • 평점   별 5점

너무 흥미롭게 잘 봤습니다 ^^.. 언젠가 이 기사의 확장팩(?) 비슷하게 해서 나왔으면 좋겠네요.. ^^

2009-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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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 평점   별 5점

사람의 경우 친자가 아닐 확률이 30%나 된다는 해석은 다소 무리가 있습니다. 표본자체가 친자확인을 요청한 경우로 한정지어졌기 때문에 친자의심이 가는 경우의 결과인 것이죠. 무작위 표본추출을 통해 검사한다면 훨씬 낮은 결과가 예상됩니다.

2009-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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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진
  • 평점   별 5점

동물들의 외도에 대해선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정도로 심할 줄은 몰랐네요. 암컷은 누구의 자식을 낳든 자신의 유전자는 이어지게 되니깐 자기 마음에 드는 짝과 맺어질려고 하는 본성이 있는듯 하네요. 수컷은 많은 암컷을 거느니려하고... 인간사회랑 비슷한듯.

2009-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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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재흥
  • 평점   별 5점

흠, 사람들의 경우도 30%가 친자가 아닐 확률이라는 사실이 재미있네요.

2009-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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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존
  • 평점   별 5점

그래봤자 사람이든 동물이든 암컷의 핏줄인 것을... 쯧쯧..

2009-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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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용국
  • 평점   별 5점

이런 것에 흥미가 있다면 붉은 여왕이란 책을 추천해드림... 저 기사의 확장판임...

2009-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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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욱
  • 평점   별 5점

허장성세...!!!

2009-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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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결
  • 평점   별 5점

극적 구성을 위한 인터뷰 재밌었습니다.

2009-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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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권
  • 평점   별 5점

종족번식은 살아있는생명체라면 누구나 다 살아가면서 해야돼겠지만 한번씩 생각한다 만약인간도 자웅동체의 몸을 가졌으면 결혼,이혼,강간이런것은 없을것 같은데..^^

2009-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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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in
  • 평점   별 5점

정말 흥미로운 기사였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2009-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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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존
  • 평점   별 5점

인간도 동물이니... 동물들 특히 수컷은 왜 자기 종족번식에 피흘리는 혈투를 하는 피곤한 삶을 살까요?

2009-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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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미애
  • 평점   별 5점

종족번식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실로 본능에 따름은 교묘하고 오묘하고 흥미진진 하네요.

2009-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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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bby
  • 평점   별 5점

흥미롭군요~^^

2009-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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