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금단의 유혹, 운동선수와 약물

<KISTI의 과학향기> 제648호   2007년 08월 31일
지난 8월 7일 미국 메이저리그의 역사를 새로 쓰는 사건이 벌어졌다. 배리 본즈 선수가 행크 아론 선수가 세운 통산홈런기록 755개를 깨고 756번째 홈런을 친 것이다. 그런데 마땅히 떠들썩해야할 언론의 반응이 미지근했다. 오히려 스포츠전문채널 ESPN은 야구 전문가 7명의 반응을 내보내 “대기록은 인정하나 위대함은 없다”고 평가절하했다.

배리 본즈의 기록이 이처럼 냉대를 받는 이유는 그의 홈런이 스테로이드를 복용해 만든 ‘약물 홈런’이라는 의심 때문이다. 88서울올림픽에서 캐나다 육상선수 벤 존슨이 약물복용(도핑, Doping)으로 금메달을 박탈당한 사건 이후로 운동선수의 약물 복용 사건은 잊을 만하면 한번 씩 등장하는 이슈다. 홈런 기록의 가치에 대한 논쟁은 뒤로 하고 운동선수의 도핑에 대해 알아보자.

도핑이란 운동선수의 신체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약물을 복용하는 행위를 말한다. 운동선수에게 도핑의 유혹은 늘 존재한다. 미국의 한 스포츠 잡지가 국가대표 육상선수를 대상으로 ‘이 약을 복용하면 확실히 금메달을 딸 수 있는 대신 부작용으로 7년 뒤 사망한다. 당신은 복용할 것인가?’라는 설문조사를 했는데 놀랍게도 80%의 선수들이 복용하겠다고 답했다고 한다. 오랜 시간 땀의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만큼 약물의 유혹도 크다는 얘기다.

운동선수들이 가장 많이 쓰는 약물은 ‘아나볼릭 스테로이드’다. 아나볼릭 스테로이드는 남성호르몬과 비슷한 유사체로 단백질 합성을 촉진하기 때문에 근육을 빨리 만들 수 있다. 이 때문에 많은 운동선수와 보디빌더들이 단기간 몸을 만들기 위해 복용한다. 근육을 늘리는 효과 외에도 에너지 대사 속도를 높여서 단시간에 폭발적인 힘을 발휘하게 해준다. 또 적혈구 숫자를 늘려서 산소를 더 많이 쓸 수 있게 해 결과적으로 운동 능력을 비약적으로 향상시킨다.

아나볼릭 스테로이드의 분자 구조를 조금 바꾼 ‘디자이너 스테로이드’도 있다. 배리 본즈가 복용한 약물은 ‘테트라 하이드로 게스트리논’(THG)이라는 디자이너 스테로이드로 알려져 있다. 간단히 말해서 아나볼릭 스테로이드와 같은 효과를 내면서도 구조를 바꿔 도핑 검사에 잘 걸리지 않도록 한 것이다.

‘혈압강하제’도 특정 운동선수에게는 큰 도움을 준다. 말 그대로 혈압을 낮추는 역할을 한다. 저혈압이 운동 능력 향상과 무슨 상관이 있겠냐고 하겠지만 손 떨림을 줄여주기 때문에 사격, 양궁 같은 경기에서 매우 유리해진다. 이 외에도 격투기 같은 체급별 운동에서 체중을 줄이기 위해 이뇨제를 쓰기도 하는데 역시 금지 약물이다.

최근 유행하는 약물은 ‘에리스로포이에틴’(EPO)과 ‘성장호르몬’이다. EPO는 신장에서 생산되는 당단백질 호르몬으로 적혈구 생성을 촉진한다. 적혈구가 늘어나면 산소를 더 많이 흡수할 수 있기 때문에 지구력이 좋아진다. 마라톤, 자전거 경주, 철인 3종 경기 같이 지구력을 요하는 선수들이 많이 복용한다.

성장호르몬은 원래 대뇌 밑에 위치한 뇌하수체 전엽에서 분비되는 단백질 호르몬이다. 뼈를 성장시키고 대사를 촉진한다. 근육을 자라게 하는데 도움을 주기 때문에 스테로이드의 대체 약물로 쓰인다. 성장호르몬은 도핑 검사로도 찾기 힘들다. 원래 인체에서 극소량 분비되는 호르몬인데다 1시간만 지나면 분해되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유전자 조작’이 새로운 도핑이 될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어 근육을 만드는 유전자를 세포에 주입하면 근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영국의 과학저널 ‘네이처’는 내년 열리는 베이징올림픽에서 육상과 사이클 종목에 유전자 조작 선수가 등장할지 모른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이쯤 되면 ‘스포츠 정신’이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현재 국제 스포츠 기구는 약 200종 이상의 금지 약물 목록을 정하고 엄격하게 규제하고 있다. 도핑 검사 기술도 나날이 발전해 아무리 교묘하게 조작된 약물도 대부분 발각된다. 이렇게 약물 복용을 엄격히 금지하는 이유는 스포츠 공정성을 위해서기도 하지만 이에 앞서 선수 본인을 위해서다. 스테로이드는 장기간 복용할 경우 심혈관계에 무리를 줘 심할 경우 생명까지 앗아갈 수 있다. 또 도핑 검사를 피하기 위해 만든 최신 약물일수록 부작용이 알려져 있지 않아 더 위험하다.

88서울올림픽 MVP이자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는 여자 100m 세계기록 보유자인 미국 육상 선수 그리피스 조이너는 금메달을 수상한지 10년 뒤인 1998년 사망했다. 그녀의 사인을 조사한 사람들은 그리피스 조이너가 당시 도핑 검사에 걸리지 않는 최신 약물을 복용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심지어 동유럽 국가들에는 현재 스포츠 코치, 감독직을 맡을 50대가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약물 부작용으로 1960~1970년대 뛰었던 선수들이 일찍 죽었기 때문이다.

물론 약물의 힘을 빌리지 않고 순수한 노력만으로 뛰어난 성과를 내는 운동선수들이 더 많다는 건 분명하다. 운동선수가 만들어 낸 신기록이 아름답고 감동적인 이유는 그 숫자가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오랜 땀방울 때문이 아닐까. 선수와 코치가 이 금단의 유혹을 떨치고 정정당당하게 승부해 오래도록 바래지 않는 감동을 선사해 주길 바란다. (글 : 김정훈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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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직
  • 평점   별 5점

운동종목에 따라 복용하는 약물이 차이가 있군요. 유전자 조작까지 할려고 하다니 정말 너무하군요. 스포츠의 세계가 도핑으로 물들지 않길 바랄 뿐입니다.

2009-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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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유불급
  • 평점   별 5점

과유불급 이라는 말이 생각나네요. "정도에 지나침은 정도에 미치지 못함과 같음. ‘중용’이 중요하다는 뜻에서 이르는 말." 좋은성적 이나 외모 를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이 없어지길 바라면서...

2007-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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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
  • 평점   별 5점

그리피스 조이너가 약물복용했다고 아직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은 걸로 알구있는데요. 자다가 죽었는데 평소에도있던 간질때문에 숨못쉬어서 죽었다고 들었는데. 밝혀지지 않은거면 벌써 사실로 인정된것처럼 쓰시면안되죠.ㅠㅠ.

2007-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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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훈
  • 평점   별 5점

필자입니다. 그리피스 조이너의 직접적인 사인은 심장마비입니다. 그 원인은 공식적으로는 "정확히 모른다"인데 단정적으로 쓴 것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단 그리피스 조이너의 죽음 이후로 미국 체육계에 약물에 대한 반성 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났습니다. 본문 중에 운동선수에게 "약물 복용하겠냐"는 설문조사도 그 당시 있었던 겁니다. 이것이 뭘 의미하는지는 분명하지요. 본문 내용은 추정한다 정도로 바꿨습니다.

2007-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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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영
  • 평점   별 5점

그리피스 조이너가 약물이라 ... 그럼 당시 약물복용으로 금메달 박탈당한 벤 존슨만 바보되는 건가. 미국이라는 나라는 참-

2007-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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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석원
  • 평점   별 5점

근데 스테로이드가 독약처럼 계속 광고되는게 안타까워요. 어떻게 보면 인류가 스테로이드라는 약품때문에 많은 혜택을 보고 있음에도 이런 부적절한 사용 때문에 부정적인 시각을 못 벗어 나는군요.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피부연고등에는 대부분 스테로이드가 들어있습니다. 스테로이드, 부신피질호르몬이던가요? 과도하게만 사용하지 않으면 이정도의 만병통치약도 아스피린 제외하고는 드믑니다.

2007-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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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ento
  • 평점   별 5점

흥미로운 내용이었습니다. 스테로이드 계열의 약물이 몸에 안좋다는건 알았지만 저정도로 치명적이라는 건 몰랐네요. 필드의 패션모델 그리피스 조이너가 바람같이 달리던 모습이 생각나네요. 그게 약발이었다는.....

2007-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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