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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마다 다른 밤의 길이를 알린 자격루의 원리
<KISTI의 과학향기> 제3779호 2022년 08월 22일지난해 6월, 과거 한양의 중심지였던 인사동을 발굴 조사하던 중 조선 전기에 해당하는 문화층에서 도기 항아리가 발견되었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항아리가 발견된 곳 일대에서 자격루 부속품과 함께 여러 유물들이 발견된 것이다. 이 덕분에 문헌으로만 전해오던 자격루 시보장치의 구체적인 원형이 최근 밝혀졌다.
그림 1. 2021년 6월 출토된 인사동 유물들. (출처: 국립고궁박물관)
낮 시간과 밤 시간을 다르게, 조선의 시간 체계
조선 시대에는 낮과 밤의 시간을 표현하는 방법이 달랐다. 낮 시간은 하루를 2시간씩 일정하게 12등분하여 12간지로 표현한 정시법을, 밤 시간은 해가 진 시점부터 다음날 해가 뜨기까지를 밤으로 여기고 이를 25등분하는 부정시법을 사용하였다. 부정시법은 계절마다 밤의 길이가 달라지지만, 일정한 시계가 없던 백성들에게는 생활 속에서 해가 지고 뜨는 것을 보고 시간을 판단할 수 있는 직관적인 시간 체계였다.
경점법(更點法)이라고도 불리던 부정시법은 일몰부터 일출까지의 밤 시간을 다섯 등분하여 5경(更)이라 부르고, 각각의 경들을 다시 다섯 등분하여 25점(點)이라 불렀다. 1경(초경)은 별이 보이기 시작할 때, 2경은 하늘이 깜깜해질 때, 3경은 한밤중, 4경은 한밤중을 지난 새벽 무렵, 5경은 날이 희미하게 밝아질 때로 구분하였다.
계절에 따라 일몰과 일출 시간이 변하므로 경점의 길이는 절기마다 달랐다. 동지와 하지 때의 밤 시간은 대략 2시간 정도 차이가 나 동지 때 1점은 약 31분, 하지 때 1점은 20분 정도였다. 그렇다면 조선 시대 사람들은 계절마다 길이가 달라지는 밤 시간을 자격루를 통해 어떻게 알렸을까?
일정하게 흐르는 물의 양으로 시간을 측정
1434년 세종의 명으로 경복궁 경회루 남쪽 보루각에 장영실이 만든 자격루가 처음 설치되었다. 일정하게 흐르는 물의 양을 통해 시간 변화를 파악하는 자격루는 물을 흘려보내는 부분과, 시간을 자동으로 알리는 시보장치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1434년 세종의 명으로 경복궁 경회루 남쪽 보루각에 장영실이 만든 자격루가 처음 설치되었다. 일정하게 흐르는 물의 양을 통해 시간 변화를 파악하는 자격루는 물을 흘려보내는 부분과, 시간을 자동으로 알리는 시보장치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일정하게 흐르는 물을 받는 수수호(受水壺)에 물이 차오르면 수수호 안의 잣대가 떠오른다. 떠오른 잣대의 끝이 특정 높이마다 있는 구슬을 떨어뜨려 시간에 맞게 자동으로 종과 북, 징을 치는 시보장치를 작동시켰다. 문헌에 따르면 잣대의 왼편에는 12시를 알리는 12개의 구슬 구멍이, 오른편에는 밤 시간을 알리는 25개의 구슬 구멍이 뚫린 경점용 동판이 설치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림 2. 복원된 자격루에서 주전이 설치된 부분(노란색). (출처: 국립고궁박물관)
인사동에서 출토된 자격루 부속품의 구조와 쓰임새
현재 자격루 유물은 1536년 중종대 제작된 물 항아리 3점(대파수호, 중파수호, 소파수호)과 수수호 2점만이 전해온다. 시보장치에 관한 자료는 『세종실록』에 실린 「보루각기(報漏閣記)」, 정조 대 관상감원 김영이 편찬한 『누주통의(漏籌通義)』 등의 문헌으로만 전해왔다.
그러던 중 인사동 발굴 현장에서 실제 자격루 시보장치의 부속품이 출토된 것이다. 출토된 유물은 구슬을 방출하는 부분인 주전(籌箭), 즉 동판과 구슬 방출 기구에 해당한다. 동판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구슬을 방출하는 원형 구멍이 뚫려 있었고, 구멍 간격이 다른 세 가지 종류의 동판이 발견되었다. 원통 형태의 부속품과 은행잎 모양의 갈고리는 동판에 연결된 것으로, 이를 통해 구슬을 저장했다가 방출시키는 시보장치의 작동 구조가 세상에 드러났다.
국립중앙과학관 윤용현 박사와 천문연구원 김상혁, 민병희 박사 연구팀에 따르면 출토된 동판은 밤 시간을 알리는 경점용 주전으로 밝혀졌다. 자격루는 계절별로 밤의 길이가 달라짐에 따라 절기마다 구멍 간격이 다른 11개의 동판을 사용했는데, 문헌에 따르면 1전은 동지 전후, 6전은 춘추분경, 11전은 하지 전후에 사용하였다. 따라서 ‘一箭(일전)’이라 음각되어 있는 출토 유물은 밤 길이가 가장 긴 동지 무렵에 사용한 동판임을 알 수 있다. 윤용현 박사 연구팀이 동판의 구멍 간격 비율을 계산한 결과 세 종류의 동판 중 나머지 두 동판은 3전과 6전 동판에 해당함을 밝혀냈다.
그림 3. 자격루 주전 부분(왼쪽), ‘일전’이라 음각된 유물(오른쪽 위), 자격루 구슬 방출 장치 부속품(오른쪽 아래). (출처: 국립고궁박물관)
연구팀에 따르면 함께 출토된 유물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유물은 1437년에 제작된 일성정시의이며, 가장 늦은 시기의 유물은 1588년에 제작된 총통이라고 한다. 연구팀은 출토된 자격루 동판의 너비가 기록에 남아있는 세종 시기의 동판 기록과 일치하지 않음을 확인하였다. 따라서 함께 출토된 유물의 제작 시기를 고려하여 중종대 자격루 부속품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하였다.
이번 인사동 출토 유물에서는 문헌으로만 전하던 자격루 부속품뿐만 아니라 훈민정음 창제 당시 표기가 반영된 1,600여 점의 한글 금속활자, 천문 시계 일성정시의 조각, 총통과 동종 등 그동안 실물로 확인하기 어려웠던 조선 전기 금속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조선 전기 과학기술의 면모를 파악할 수 있는 금속 유물들이 대거 출토된 것이다. 이 유물들은 관청이나 궁궐이 아닌 일반 건물로 추정되는 터에서 발견되었으며, 일부는 일정한 크기로 잘게 잘린 채 발견되었다. 궁궐 소유의 금속 물건들이 어떤 연유로 궐 밖 항아리에 담긴 채 묻혔는지, 함께 발견된 과학 유물들은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을지 향후 연구가 기대된다.
글: 이하늘 과학칼럼니스트/ 일러스트: 이명헌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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