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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변 모으는 은행 있다? 인류를 지킬 데이터 모으기의 세계
<KISTI의 과학향기> 제3869호 2023년 06월 26일<내 속엔 미생물이 너무 많아>라는 책 제목처럼, 우리 몸속에는 미생물이 약 39조 개 산다. 인간 개체 한 명에 있는 세포 수가 약 30조 개임을 생각하면 엄청난 수치다. 어쩌면 나는 온전히 ‘나’라고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39조 개의 미생물이 없으면 나도 없으니까.
특히 장에 사는 미생물 군집인 ‘마이크로바이옴’이 인간의 신체적, 정신적 건강에 꼭 필요한 요소임을 입증하는 연구 결과가 쏟아지고 있다. 장내 미생물은 인간의 면역계 강화, 에너지 공급, 발암 유전자 발현 억제 등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한 장과 뇌 신경계는 장내 미생물을 매개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장뇌축’을 이루고 있어, 인간의 인지 발달과도 관련을 맺고 있다.
의료 현장에서는 실제로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2012년 호주에서는 건강한 사람의 대변에서 장내 미생물을 정제해 위막성 대장염 환자에게 이식하는 ‘대변 이식술’을 시행했고 효과를 보았다. 이후 대변 이식술은 더 많은 환자에게 시행돼 오늘날에는 보편적인 치료 방법으로 자리 잡았다.
그림 1. 미국 럿거스대 연구팀은 영하 80도의 극저온에서 장내 미생물을 보관하고 있다. 출처: Microbiota Vault
대변을 모아라!
장내 미생물을 활용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건강한 사람의 대변을 확보하는 일이다. 이를 통해 어떤 장내 미생물이 유용한지 연구하고, 장내 미생물의 유전체 지도를 그리며, 건강한 사람과 특정 질환이 있는 사람 간의 장내 미생물 구성을 비교하는 등 미래의 질병 정복을 위한 다양한 실험연구를 수행할 수 있다. 그래서 나온 아이디어가 바로 우스꽝스럽게도 들리는 ‘대변 은행’이다. 대변 표본을 수집함으로써 미생물 저장고를 만들자는 아이디어는 미국 럿거스대학교 미생물학자 글로리아 도밍게즈-벨로 교수를 비롯한 연구자들이 2018년 과학학술지 <사이언스>를 통해 처음 제안했다.
현재 대변 은행은 미국 럿거스대학교 연구진이 스위스 바젤대·로잔대·취리히대 연구진과 합심하여 스위스 취리히대학교에 설치돼 시범 운영 중이다. 2022년 11월부터 에티오피아 어린이의 대변을 비롯해 지금까지 라오스, 푸에르토리코, 페루 등에서 대변 표본 3천여 개를 모아 저장했다. 2024년까지 2천 개를 추가해 총 5천 개를 모으는 것이 목표다. 최종 목표는 10만 개 이상의 표본을 저장할 수 있는 저장고를 구축하는 것으로, 알프스에 있는 옛 군사용 벙커를 유력 후보지로 꼽고 있다. 대변 은행은 영하 80도의 극저온에서 표본을 냉동 보관한다. 에글리 교수는 “어떤 미생물은 20분마다 분열할 정도로 분열 속도가 빨라서, 미생물을 단시간에 얼릴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림 2. 장내 미생물 다양성은 정글/사바나에서 시골, 도시(왼쪽부터)로 갈수록 줄어들고 있었다. 출처: Microbiota Vault
대변 은행은 도시화와 산업화로 장내 미생물의 다양성이 감소하고 있다는 위기의식에 따른 것이다. 미생물 다양성이 감소하면 인체에 유익한 장내 미생물을 정제해내는 데도 한계가 생긴다. 연구에 따르면 소독 처리된 물, 가공식품, 항생제, 방부제 등 전반적으로 인류의 위생 상태가 개선된 것이 거꾸로 장내 미생물군의 다양성을 감소하는 아이러니한 결과를 만들었다고 한다. 또 수렵채집을 하는 남미 원주민의 장내 미생물 다양성은 도시에 사는 서구인보다 최대 2배나 높다고 한다.
인류의 미래와 복지를 위한 다양한 과학 은행들
과학 연구를 위한 데이터를 확보하는 은행에는 대변 은행만 있는 것이 아니다. 노르웨이의 스발바르라는 지역에는 전 세계에서 모인 종자 약 110만 종을 보관하는 ‘씨앗 은행’이 있다. 기후 변화로 미래에 농작물 대멸종 사태가 벌어질 때를 대비한 것이다.
안정적인 에너지 확보를 위한 저농축 우라늄 은행도 있다. 원자력 발전 연료에 쓰이는 저농축 우라늄은 어느 국가나 만들 수 없다. 우라늄 농축은 미국·러시아·중국·프랑스·영국 등 UN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5곳과 일부 국가만 가능하며, 그중 러시아는 농축 우라늄 시장의 40%를 차지한다. 지금처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중일 때는 저농축 우라늄 확보에 비상이 생긴다. 이에 국제원자력기구에서는 2017년 카자흐스탄에 '저농축 우라늄 은행'을 설립해, 세계정세에 영향을 받지 않고 원자력발전소를 운영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이곳은 저농축 우라늄을 최대 90톤까지 저장할 수 있는데, 이 양은 대도시 하나가 3년 동안 모든 시민에게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양이라고 한다.
영국 맨체스터에는 탈모 치료를 위해 설립한 2019년 설립된 ‘모낭 은행’도 있다. 탈모 치료 업체 '헤어클론(hairclone)'이 운영하는 곳이다. 탈모가 시작되기 전의 건강한 모낭을 미리 채취해 두었다가 탈모 증세가 생기면 건강한 모낭에서 모유두세포를 추출한 뒤 이 세포를 탈모 부위에 이식한다. 과학 연구와 인류를 위한 과학의 응용은 이처럼 많은 데이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종자부터 ‘똥’까지 넘나드는 데이터 모으기의 열정에는 한계가 없다.
글: 권오현 과학칼럼니스트/그림: 유진성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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