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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여행] 영국에서 만난 경이로운 순백의 공간, 세븐시스터즈
<KISTI의 과학향기> 제2978호 2017년 07월 26일여행은 미래의 목표점을 정해 인생을 바꿔준다. 정약용은 긴 유배기간 동안 길이 남을 사상적 기초를 정립했고, 모차르트는 오가던 여행길에서 명곡의 악상들을 떠올렸다.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여행은 둘도 없는 보약이다. 나에게도 여행은 그러했다.
오랜만의 기차여행이었다. 런던 빅토리아역에서 얼추 2시간.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이들을 다시 보러 간다. 벌써 15년이 지났다. 세븐시스터즈(Seven Sisters). 일찍부터 난 그들을 ‘칠공주’라 부르고 있다. ‘자매’보단 왠지 ‘공주’가 끌렸다. 대학 2학년 때 전공 원서 구석진 곳에서 본 자그마한 칠공주 흑백사진은 매우 매력적이었다. 나도 이런 곳을 소개할 수 있는 전문가가 되리란 생각을 했었다. 이후 이 공주님들은 내 인생의 길잡이가 되었다.
그림1. 세븐시스터즈는 영국 런던 남부의 서섹스주 이스트본 서쪽 10km 지점이자, 런던 근교의 해안 휴양도시인 브라이턴으로부터 동쪽 20km 지점에 위치한 백악기 초크(chalk)층 절벽을 말한다.
이스트본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세븐시스터즈로 향한다. 세븐시스터즈 지방공원(Seven Sisters Country Park) 안내소가 나를 반긴다. 가슴이 설렌다. 오랜 세월을 돌고 돌아 다시 들어서는 이 길이 아득한 고향 벗을 만나는 기분이다.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공주님들은 내 가슴에 어떤 메시지를 남겨놓을까.
안내소를 들러본 후 발걸음을 재촉한다. 세븐시스터즈로 가는 길은 그야말로 힐링의 길이다. 해안까지 약 1km. 굽이치며 흐르는 폭 100m 정도의 쿠크미어 강 양옆으로 초원이 펼쳐진다. 범람원이다. 오랫동안 쌓인 많은 토사들이 이렇게나 시원한 평원을 만들었다. 잔잔한 강물에 비친 햇살비늘과 살랑바람, 그리고 옅은 구름을 품은 파란 하늘. 문득 4월의 우리 하늘이 떠오른다. 벤치에 앉은 잠깐 사이, 강 저편 양떼들이 아릿한 향수를 보듬어준다.
쿠크미어 강이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 이르니 석호(위치도의 3번 지점) 습지 뒤로 세븐시스터즈가 보인다. 이내 숨 가쁜 감격이 차오른다. 내 삶의 방향을 정해준 칠공주를 다시 만난 것이다. 그것도 기억 속 그들보다 훨씬 생생하게 말이다. 오래 전엔 강 건너 뒤편에서 물끄러미 그냥 쳐다봐야만 했었다. 그러나 오늘은 이 세븐시스터즈를 온몸으로 느낀다.
그림4. 쿠크미어강 하구의 석호(위치도의 3번 지점) 뒤로 모습을 나타낸 세븐시스터즈. 이 석호에는 연안퇴적물이 해변(위치도의 4번 지점)을 이루며 강과 바다가 분리돼 연안습지가 형성돼 있다.
그림5. 세븐시스터즈의 해안퇴적물. 사암, 석회암, 처트, 셰일 등으로 된 지름 1cm 전후의 타원형 잔자갈들이 사랑스럽다.
비현실적일 정도로 눈부시다. 새하얀 암석들이 바닷물에 곱게 비쳐 한층 더 마음을 흔든다. 칠공주를 이룬 바위는 분필, 즉 초크(chalk)다. 초크층은 약 1억 년 전부터 6천만 년 전 사이의 백악기 바다에서 형성된 해성퇴적암이다. 백색 혹은 회백색 석회암이라고도 하나 그냥 초크라고 부르는 게 일반적이다. 바다 밑바닥에서 만들어진 칠공주를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융기 덕분이다. 지형학적으로 말하자면, 초크층이 융기한 ‘해안단구’인 것이다.
이곳은 신생대 제4기까지 눈으로 덮여 있었다. 1만 4천 년 전 간빙기로 접어들면서 눈이 녹기 시작해 계곡이 만들어졌고 이후 끊임없는 파도가 땅을 깎아내면서 절벽이 생겼다. 그때 눈 녹은 물이 바다를 향해 흐르며 계곡을 파 동그란 일곱 봉우리인 세븐시스터즈를 만들었다. 지금도 이 세븐시스터즈는 빗물과 심한 파랑으로 매년 30~40cm씩 뒤로 후퇴하고 있다. 한번 붕괴된 절벽은 무너진 더미가 해식(해안침식)을 막아줘 10년간은 버틸 수 있다. 사람들이 사는 초크층 절벽 아래에는 시멘트를 바르고 또 돌도 쌓아두고 있다. 해식에 약한 탓에 절벽 아래 바닷물은 늘 뿌연 색을 띠고 있다. 세븐시스터즈를 이룬 암석이 연약한 분필임을 생각하면 오랜 세월 동안 잘 버텨주는 것이 대견할 정도다.
그림7. 주택가 인근의 초크층 절벽면에는 침식을 방지하기 위해 인공구조물이 설치돼 있다.
초크층 절벽 아래에는 넓은 파식대가 놓여 있다. 이곳 소개 자료에는 이 파식대 끝에 절벽이 자리하고 있었을 100년 전의 모습을 상상해보라고 적혀 있다. 이 파식대는 초크층 절벽이 후퇴하면 생긴 것이다. 깎여 나간 초크층의 파편들이 널려 있을 법도 하지만, 초크층은 이내 바다에 녹아 버려서 여긴 갯벌도 없고 모래사장도 없다. 그냥 절벽이 뒤로 물러나면서 생긴 암석 벌판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암석 벌판이라는 말에서 연상되듯 절벽 아래가 불모지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절벽은 수많은 생명에게 삶의 터전을 제공해준다. 게와 바다새우가 곧잘 눈에 띄는가 하면 아주 작은 예쁜 조개들이 수없이 붙어 있어 발걸음을 떼기가 겁난다. 세븐시스터즈에서 만난 작은 생태계는 예상치 못한 기쁨이자 기분 좋은 놀라움이었다.
그림9. 세븐시스터즈 해안의 파식대에서 만난 생물들.
초크층 절벽이 마냥 순백인 것만은 아니다. 저 멀리 쿠크미어 강 뒤쪽 초크층은 누런 토층에 덮여 있다. 이는 빙하기 때 극지에서 불어온 바람(arctic wind)이 쌓아놓은 황토층, 뢰스(loess)층이다. 이 뢰스층은 빗물과 또 다른 조화를 부려 초크층에 복잡한 구조를 만들어 놓는다. 황토층에 스며든 빗물이 산성으로 변해 초크층을 녹이면서 파이프 같은 통로를 만드는 것. 이곳을 따라 흘러내린 파이프류(pipeflow)는 초크층을 침식시키는 또 다른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림10. 저 멀리 해안단구 위에 쌓여 있는 뢰스층. 황토층이 초크층 위로 길게 쌓여 있다.
그림11. 초크층 위에 퇴적되어 있는 뢰스층. 빙기 때 북풍이 쌓아 놓은 황토층이다.
드디어 세븐시스터즈에 오른다. 경사가 생각보다 급하다. 잠시 주변을 살피니 단구 위로 한없이 펼쳐진 녹색초원과 흰색 절벽, 바다색과 하늘색이 그림처럼 조화롭다. 꼭대기까지 올라서니 절벽이 아찔하다. 제일 높은 봉우리인 헤이븐 브라우(Haven Brow)는 해수면으로부터의 높이가 77m나 된다. 위험해 보이는데도 난간 하나 없다. 자연보존을 위한 영국인들의 확고한 의지이리라. 한동안 생각에 잠겨본다.
세븐 시스터즈. 지구촌 어느 구석을 둘러봐도 이같이 아름다운 순백의 절벽 해안은 찾아보기 힘들다. 세계적인 명소다. 영국 추천여행지 1순위이기도 하다. 특히 필자에게는 삶의 목표를 정해준 곳이라 그 어느 곳보다도 소중한 장소다.
언제 또 올 수 있을까. 이젠 일어서야 할 시간이다. 삶의 의미를, 사는 재미를 안겨다 준 그녀들을 두고 돌아서는 마음이 많이 무겁다. 평범한 일상에서 이런 비경을 찾고 있는 영국인들은 이곳에서 어떤 사색을 즐기고 있을까. 그들이 우리나라의 비경을 찾는다면 어떤 생각에 잠기게 될지 문득 궁금해진다.
글·사진: 박종관 건국대 지리학과 교수 / 일러스트 : 유진성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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